고려대학교 선택교양 한국사의 새로운 해석 필기
- 최초 등록일
- 2016.12.02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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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 받은 필기본입니다. 깨끗하게 문장이 정리되어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소설읽듯 편하게 보시면 머리에 들어오실 거에요. 유용하게 쓰세요~
목차
1. 광개토 대왕 비문과 만들어진 고대
2. 신라의 여왕들
3. 고려의 대외관계와 무역
4. 고려왕실과 우왕의 정치
본문내용
광개토 대왕? 392년 5월 19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412년까지 22년 재위 (삼국사기- 후대인)
그런데 이 비문에서는 391년에 즉위하였다고 써져있다. (당대인. 이 편이 더 맞음!)
광개토 대왕은 약축한 이름. 일본에서는 호태왕이라고 줄여서 부릅니다.
‘영락’ 연호 (영락 5년..) 사용!
1. 비문의 형태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 근교(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
높이 6m, 무게 37톤, 장방형, 예서체로 글자가 잘 쓰여짐, 1775자
한 글자 크기가 14~15cm! 칼 자국이 있음.
2. 비문 건립 목적
아버지가 죽은 후 414년 장수왕이 건립.
광개토대왕 전 왕들 간략하게
1) 광개토대왕의 업적 기리기 위하여! (주목적)
그리고 묘지기들 관한 내용도 있는데. 330호 나열 -> 도망가지 말아라.
2)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들 도망가지 못하게
라고 생각을 했는데....
3. 비문 발견 경위
1) 우리 역사책에서 보았을 때 처음으로 비석을 알아차린 것은 조선 초기.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가 발견했다는 내용. (거대한 비석이 있다-)
2) 중종 31년 (16C) 조선 중기에 심언광이 사신으로서 중국 왕래. 비 발견하고 시 한 수 읊은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수록됨. 그 당시 심언광은 여진족 금나라 황제의 비인 줄 착각하고 시를 읊었다.
3) 후금족 청나라가 자기들의 고향땅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봉금정책을 펼쳐서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져 발견이 늦춰졌다.
4) 186~70년대 사람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다 1880년대 (청나라에 사상적 바탕이 없는 금석학, 고증학 유행할 당시) 발견이 됨. 1880년대 초반 탁본이 많이 남아있음.
5)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육군 포병 중위 사코 카게야키가 그 지역 여행이자 중국 지도(군사지도) 만들기 위해 스파이 짓(1883년)하다 발견하고 탁본 만들어 일본에 보냄. -> 5년 후 발표하면서 임나일본부설 뒷받침 함. 이 때 사코가 만든 탁본 ‘쌍구가묵본’ or ‘묵수확전본’ 이라 부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