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러일전쟁부터)
- 최초 등록일
- 2017.06.13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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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러일전쟁과 일제의 한국 병합
2. 국권회복운동(1910년대 독립운동)
3. 1910-20년대 일제의 식민지배정책
4.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5. 1920년대 독립운동
6.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정책과 민족해방운동
본문내용
1. 러일전쟁과 일제의 한국 병합
러일전쟁의 배경으로 의화단 사건과 1차 영일 동맹이 있다. 중국에서는 백련교 계통의 의화단이 반외를 주장하면서 외국인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적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 본토에서 만주까지 확대되었고 영국, 일본을 포함한 열강들은 의화단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의화단 사건이 끝나고도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았고 이에 일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은 한국에서 우월권을 확보하고 그 대가로 러시아에 만주 경영 자유를 인정하였지만 러시아 세력을 만주에서 쫓아내기 위해 영국과 협력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의화단 사건이후 일본은 만주 문제가 한국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임을 인식하고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를 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미완성되고 영일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러시아의 만주점령으로 인한 중국의 반러정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 생각하였다. 러시아는 영일동맹의 성립에 강경한 태도로 만주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한국에 대한 침략도 적극적이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인천항과 랴오둥 반도 뤼순항에서 러시아 군함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은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당연히 승리를 예상했지만 일본의 총력전으로 승기는 일본으로 기울였다.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는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러일전쟁을 종결시켰다. 일본은 조약 사전에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협정을 맺음으로써 일본이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제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외교적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와 한국병합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선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러일전쟁은 시작됐으며,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적 지배기반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전쟁 준비를 위한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권리를 확보하였다.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국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러일전쟁을 준비하게 하였고 러일전쟁에서 한국이 일본 편에 서게 하여 ‘을사조약’ 체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