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근정전 월대에 관한 연구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0.05.27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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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월대는 궁궐, 종묘 및 사찰의 중요건물 앞에 넓은 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건물의 격을 높여주는 역할과 함께 행사 시 이용하였다. 조선 전기 월대에 관한 연구는 창건 경복궁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루어 졌으나 월대에 대한 독립적인 논문은 현재의 월대 조각상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경복궁 창건기사와 월대의 이용기록, 『세종실록』의 「오례」 배반도를 참고하여 조선 전기의 월대 규모와 함께 계단의 크기와 배치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월대 규모
1. 태조실록의 월대 규모
2. 조선 전기의 월대의 수용인원
1)조선왕조실록에서 월대 기록
2)오례의 배반도
Ⅲ. 월대 계단의 규모와 배치
1. 태조실록의 계단 규모와 방향
2. 오례 배반도에서 계단의 배치
Ⅳ. 결론
참고문헌
부록
ⅰ. 배반도 월대 인원 비교표
ⅱ. 정지급성절망궐행례지도
ⅲ. 근정전배표지도
ⅳ. 정지급탄일근정전조하지도
ⅴ. 정지회백관지도
ⅵ. 회례연도
본문내용
경복궁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처음 세운 궁궐로 조선의 법궁으로 태조 4년(1395)에 완성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경신)
되고 여러 차례의 중건으로 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명종 8년(1553)의 화재 『명종실록』, 명종 8년(1553) 9월 14일(정사)
로 강녕전을 비롯한 여러전각이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고, 임진왜란 때 전소하여 빈터로 남게 되었다. 이후 현종, 숙종 때 중건논의가 있었으나 중건하지 이루지 못하다가 고종 때 비로소 중건이 실현되었으나, 이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건물 대부분이 헐리게 되었다. 광복 후에 조선총독부청사의 철거를 시작으로 2단계의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며, 1991년부터 2009년까지 단기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마지막으로 광화문을 복원 중에 있다.
이러한 경복궁은 창건 당시 새 왕조를 상징하는 정궁으로서 그 중 정전인 근정전은 왕이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중국 사신이 가져온 조서를 맞이하는 등 대규모 의례장소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근정전은 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넓은 마당인 조정을 두었으며 조정 주위로 행각을 둘러 권위와 엄숙함을 더 했고, 중앙의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지어졌다.
월대는 궁궐, 종묘 및 사찰의 중요건물 앞에 넓은 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건물의 격을 높여주는 역할과 함께 행사 시 이용하였다. 조선 전기 월대에 관한 연구는 창건 경복궁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루어 졌으나 월대에 대한 독립적인 논문은 현재의 월대 조각상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경복궁 창건기사와 월대의 이용기록, 『세종실록』의 「오례」 배반도를 참고하여 조선 전기의 월대 규모와 함께 계단의 크기와 배치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월대의 규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