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의 역할과 성격
- 최초 등록일
- 2011.12.23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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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Ⅰ. 서문
조선시대의 정치적 부문에서의 역사적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어 왔고 그 연구 성과도 상당할 정도로 축적되었다. 더불어 최근에는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 계층의 삶을 살피기 위한 민중사적 연구도 유행이 되어 가고 있지만, 문화사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특히 회화사 분야에서 우리들이 흔히 떠올리는 조선시대의 그림은 사군자로 대표되는 문인화난 조선후기의 민화, 아니면 산수화정도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만 조선의 회화를 다 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조선에도 엄연히 전문적으로 그림에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바로 圖畵署의 畵員이다. 조선 회화의 전통은 바로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의 일화를 그린 <바람의 화원>이 소설, 드라마, 영화로까지 제작되면서 조선시대 화원에 대해 많은 대중적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신윤복 이외에도 <夢遊桃源圖>로 잘 알려진 安堅, 조선후기의 풍속화로 유명한 金弘道 등이 모두 도화서 출신의 뛰어난 화원들이다.
목차
Ⅰ.서문
Ⅱ. 圖畵署 제도
1. 도화서 제도의 성립
2. 문화정책기관으로서의 도화서
Ⅲ. 화원의 성격
1. 기술자로서의 화원
2. 화원의 신분
1) 조선 초기의 화원
2) 조선 중기 및 후기의 화원
3) 조선 말기의 화원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圖畵署 제도
1. 도화서 제도의 성립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이전에 도화서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경우는 신라 시대의 경우 彩典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기록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高麗史〉百官志 外職條에서 그 내용의 일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인종 14년에 서경의 분사를 監軍과 分司御使台만 두고 모두 없앴다가 2년 후에 다시 6조를 두게 되고, 명종 8년에는 관제가 다시 고쳐졌는데 이때 圖畵院을 소속케 하였다. 여기에서 서경의 분사는 중앙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중앙에도 도화원이란 직관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 된다.
조선시대의 경우 개국 초 부터 회화의 일을 관장하는 畵工이 있어 이들의 소속기관인 도화원과 같은 것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종 2년 門下府에서 올린 상소에서 도화원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보인다. 이것이 도화서로 개칭된 것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도화서라는 명칭이 성종대 실록에서 빈번히 보이기 시작하므로 아마도 세조 말년 경에 이르러서 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조 12년에 관제를 고치면서 상당수의 관서명이 ‘署’로 개칭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김은영, <조선시대 화원의 예술관과 형성배경에 관한 고찰>,《미술교육논총》, 21권, 2007.
윤범모, <조선시대 도화서제도의 성립>, 《동국사학》, 17권, 1982.
이대희, <조선시대문화정책의 역사적 변화>,《한국행정학보》, 37권, 2003.
안휘준, <조선왕조시대의 화원>, 《한국문화》, 9권,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