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서는 배포용으로 복사 및 편집이 불가합니다.
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한국구비문학회
ㆍ수록지정보 : 구비문학연구 / 37권
ㆍ저자명 : 최동현
ㆍ저자명 : 최동현
목차
1. 머리말2.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
3.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
4. 맺음말
참고문헌
한국어 초록
본고에서는 김연수의 학력, 판소리 학습과 판소리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김연수가 서울로 유학하여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연
수의 친구였던 노희상의 증언을 찾아냄으로써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김연수가 한
문 공부를 한 것은 맞으나 신식 교육을 받은 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14세(1920년)까지 9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다음 1935년 유성준으로부터 <수
궁가>를 배우기까지의 15년 동안에 김연수는 무엇을 했을까? 1942년에 김연수가 만들어
발매한 <아우를 생각코>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김연수가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이미 소리를 배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또 이경엽은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
인 판소리 수업을 받기 이전에 지방의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
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김연수는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에 이
미 지방의 소리꾼들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연수는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시작한 이래 유성준, 송만갑, 정정렬에게 배웠다고 하
였으나, 정응민으로부터도 많은 부분을 배웠다.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의 특징은 세세한 부
분까지 판소리 전승형을 익히는 방식이 아니고 사설과 장단을 위주로 하여 대강의 뼈대를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것이 후에 김연수 판소리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연수는 배운 대로만 소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소리나 신소설, 신재
효 사설 등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새로 판소리를 짰다. 그래서 김연수의 판소리는
이전의 판소리와는 전혀 다른 판소리가 되었다. 정정렬 같은 사람은 이를 ‘자작’이라고 하였다.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을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김연수의 해방 전 활
동을 대표하는 것은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연수 자신은 1937년 조선성
악연구회 직속의 <조선창극좌>의 대표를 맡았다고 했으나, 이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조선의 일류명창 여섯 분’이라고 일컬어지는 등 판소리계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해방 전부터 김연수는 일부 창극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총 76면
에 이르는 음반을 발매했으며, 수차례 방송에도 출연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김연수국악단>, <우리국악단> 등의 창극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김
연수국악단>의 창단 공연 작품인 <장화홍련전>에서 김연수는 배좌수 역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이어서 <단종과 사육신>도 큰 성공을 거두어 창극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김
연수는 6.25 후 <우리국악단>을 창단하여 공연에 나섰으나 연이은 실패로 재기하지 못하
고, 마침내 1956년 창극계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창극계에서 물러난 김연수는 대한국
악원장, 국립극극단장(현 국립창극단장)을 맡아 창극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64년 최초
로 판소리 부문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며, 74년 3월 9일에 별세하였다. 김연수는
생전에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했는데, ??창본 춘향가??는 1967년에 ??창본 심청가 ? 흥보가 ? 수
궁가 ? 적벽가??는 1974년에 출판되었다.
김연수의 판소리 일생을 한 마디로 한다면 ‘창극과 함께 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연수는 창극이 본궤도에 접어들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 창극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해방 후 창극의 전성기에 가장 인기 있는 창극인이 되었으며, 창극과 함께 판소리가 흥행예
술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되자 창극단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한국악원장을 거쳐 초
대 국립국극단장이 되어 창극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김연수의 최후를 지킨 사람들의 증언
을 들어보면 김연수는 끝까지 창극을 놓지 않았으며, 자신이 새로 짠 연극적인 판소리의 전
승에 온 힘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김연수의 업적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바디 판소리는
그 뛰어난 전달력으로 인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의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김연수의 판소리는 김연수의 선택과 지향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영어 초록
The aims of this study are investigating the new facts of academicbackground, pansori learning and pansori activity of Kim Yeon-su.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belows.
1) Kim Yeon-su have never attended Jungdong Middle School.
2) Kim Yeon-su already had learned pansori from unknown country singer
before he met Yu Seong-jun.
3) Kim Yeon-su learned much from Jeong Eung-min.
4) The characteristic of Kim Yeon-su's pansori learning is to learn the
important structure instead of details. He created the details of his pansori.
In that way, his pansori became unique.
5) Kim Yeon-su worked in Joseonseongakyeonguhoe(The Society of Korean
Traditional Vocal Music). He made an appearance in some changgeuk(pansori
theatre) works and issued 76 sp pieces of pansori before 8.15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6) Kim Yeon-su organized pansori theatres such as Kim Yeon-su
Kugakdan(Kim Yeon-su Pansori Theatre Company), Urigugakdan(Uri Pansori Theatre Company). He won a greate fame as the Baejwasu character in pansori
theatre Janghwahongryeonjeon(The Story of Janghwa and Hongryeon). He
was the first president of National Pansori Theatre Company of Korea.
7) Kim Yeon-su wrote his whole pansori literature in two books.
8) Kim Yeon-su was designated as an intangible cultural asset in 1964, at
first time in Korea. He died in 1974.
We can say that the lifetime of Kim Yeon-su is a life together with the
changgeuk(pansori theatre).
참고 자료
없음태그
"구비문학연구"의 다른 논문
- 언어-놀이 문화로서 속담 연구33페이지
- 가면극 속의 장애인들52페이지
- 동해안 남대 별신굿의 특징 연구 - 안대 별신굿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46페이지
- 콤플렉스 극복 서사로서의 <이공본풀이> 연구30페이지
- 소경과 앉은뱅이 서사의 불교적 의미와 구비문학적 수용 양상32페이지
- ⌈빤짜딴뜨라(Pa?catantra)⌋의 전승과 교훈―도덕(dharma)과 현..45페이지
- ‘첫날밤 목 잘린 신랑과 누명 쓴 신부’ 유형 설화에 나타난 갈등 구조와 전승 체계32페이지
- 죽음예지태몽담의 구조적 특징과 의의39페이지
- 한국설화의 네트워크 지형 연구 시론33페이지
- 어머니신을 낳은 신화적 주체의 시선과 표현 방식36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