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의 실정
- 최초 등록일
- 2015.10.16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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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유당 조직 (1951. 12)
2. 부산 정치 파동 (1952. 5)
3. 국제 부락부 사건 (1952. 6)
4. 발췌 개헌 (1952. 7. 4)
5. 인도 뉴델리 밀회 사건 (1953. 6. 2)
6. 사사오입 개헌 (1954. 11. 29)
7. 진보당 사건 (1958. 1 ~ 1959. 7. 30)
8. 2∙4 정치 파동 (1958. 12. 24)
9. 3∙15 부정선거 (1960. 3. 15)
10.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자유당 조직 (1951. 12)
친이승만계 공화민정회와 5개 기간사회단체인 대한청년단, 국민회(1945년),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이 주축이 되어 창당, 조직되었다. 별도로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인 이범석등의 원외세력이 원외 자유당을 창당시켜 두개의 자유당이 한 지도자 아래 탄생하였다.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1951년 8월 25일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1951년 8월 31일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귀국하고,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자유당 창당을 맡겼다. 이것은 이범석의 탄탄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 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켰다.
1951년 12월 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원외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탄생했다. 원내 자유당은 장면을 리더로 하는 일파와 장택상을 리더로 하는 일파가 존재했고, 원외 자유당은 이범석을 부당수로 선출한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의 이중적인 구조는 후에 장면의 탈당, 장택상의 탈당 등 연이은 탈당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을 평당원화 시키면서 강제로 일치시킨다.
2. 부산 정치 파동 (1952. 5)
1950. 5·30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년 11월 30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에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백골단, 땃벌대 등 폭력조직을 만들어 국회 의원을 위협하는 한편, 5월 25일에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자유당(대한민국)
위키백과 부산정치파동
위키백과 사사오입개헌
위키백과 진보당
위키백과 2∙4 정치파동
위키백과 3∙15 부정선거
『해동한국사』, 신영식 이장웅 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