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삶과 문학> 소논문,레포트,수행평가 점수 UP 자료
- 최초 등록일
- 2021.03.28
- 최종 저작일
-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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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 '허균'을 소재로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한 관광통역안내사가 직접 쓴 글입니다.
여러 자료에 쓰임받기 위해 성의껏 준비하였습니다.
애독 부탁드립니다 ;-)
목차
Ⅰ. 출생과 성장
Ⅱ. 혼인과 관직생활
Ⅲ. 홍길동전에 나타난 사상
Ⅳ. 그의 장점
1. 완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꿈꿨다
2. 신분차별을 싫어하고 인간의 평등한 가치를 주장하였다
3. 자유로웠고 공감능력이 뛰어났다
1) 계생과의 관계
2)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4. 문학과 외교에 큰 업적을 남겼다
1) 『국조시산』을 지었다
2) 『성소부부고』를 지었다
3) 『조선시선』 발간의 원천이 되었다
Ⅴ. 그의 결백
1.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는 비난에 대하여
2. 칠서의 난에 대하여
3. 폐모론과 역모설에 대하여
본문내용
Ⅰ. 출생과 성장
허균은 1569년(선조3)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초당 허엽과 부인 강릉 김씨(예조참판 김광철의 딸) 사이에서 삼남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허균이 아홉 살 때 가족이 모두 상곡으로 이사 갔다. 허봉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사는 허균에게 보낸 시가 문집에 실려 있는데 허균은 그곳에서 임수정, 임현, 최천건 같은 벗들과 사귀었다. 이중에 최천건만이 오래 살았고 빨리 출세하여 허균이 벼슬에서 쫓겨날 때마다 도와주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이 시절의 허균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허균은 총명하고도 영특했다, 태어난 지 아홉 해 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여러 어른이 그를 칭찬하면서, “이 아이는 뒷날 마땅히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의 매형 우성전은 그의 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뒷날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되기는 하겠지만 허 씨 집안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허균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허균의 나이 12세인 1580년 부친 초당이 상주의 한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나이 차이가 많았던 형들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느끼며 자랐다. 학문은 둘째 형 허봉의 벗인 이달과 유성룡에게 배웠다.
허균의 가족관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허엽 (1517-1580) : 경상도관찰사. 서자들을 차별하지 말고 기용할 것을 선조에게 요청함. ∙허성 (1548-1612) : 이조 병조, 예조 판서를 지냄.
∙허봉 (1551-1588) : 이율곡을 탄핵하다가 유배살이 후에, 다시 조정으로부터 부름 받았으나 나가지 않음. 명나라를 다녀온 후 『하곡조천기』를 지음.
∙허난설헌 (1563-1589) : 사후 허균을 통해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이 발간됨.
Ⅱ. 혼인과 관직생활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1)에 급제하고 안동김씨 김대섭의 차녀와 혼인하였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참고 자료
허경진,『허균평전』,돌배개,2002.41쪽.176쪽.
조선시대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이는 과거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글 http; encykorea.aks.ac.kr 접속일자 : 2021.2.1
허균 『성소부부고』 권21 「척독하」 ‘허자한 형에게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