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칼빈주의
- 최초 등록일
- 2009.05.26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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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빈, 칼빈주의 - 이근삼
목차
1. 신학자 칼빈
2. 목회자 칼빈
3. 칼빈과 세르베투스 사건
4. 칼빈의 교회건설
5. 칼빈과 설교
6. 칼빈의 기독교 강요
7. 칼빈과 그의 성찬론
8. 칼빈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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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신학자 칼빈
칼빈은 자기 자신을“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라고 주장했다.
칼빈의 모든 교훈은 양심적으로 “성경적”이었고 특히 예정교리에 관하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가 이해한 것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으려고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칼빈을 유일한 신학자로 알려면 칼빈 주의자들을 연구 하는 것 보다는 먼저 칼빈 자신에게 가까워져야 한다. 칼빈주의나 칼빈신학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 다 있는 것으로 칼빈주의와 칼빈신학 연구는 그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아야 한다.
2. 목회자 칼빈
제네바 교역기간에서 목회자로서의 칼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렐의 불같은 간청으로 칼빈이 제네바에 참여하게 된 것은 칼빈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칼빈은 1차 제네바 목회 때 제네바 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3가지 일에 착수했다. (첫째, 자녀들의 종교교육 둘째, 도덕적 훈련 셋째, “신앙고백”의 제정)
칼빈의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고 제네바에 있을 수 없던 칼빈이 슈트라스불그에 3년 머물다 파렐과 제네바 시민의 간청에 다시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예배모범을 기초하고 교회 법규 제정위원을 내고 가결케 했다. 또한 이를 감독 시행하는 콘시스토리움을 구성하여 지금까지 시가 교회를 경영했던 것을 폐지하게 함으로 교회가 시를 감독하게끔 만들었다. 이 교회 법규로 말미암아 10년의 고투가 시작된다.
3. 칼빈과 세르베투스 사건
제네바는 상업 도시로써 풍기가 문란하고 기풍이 향락적이었으므로 교회가 요구하는 규율에 대해서 반항하며 불순종하였다. 칼빈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본토인들은 제네바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유를 원했다. 칼빈은 이들을 자유파라고 불렀다. 칼빈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삼위 일체론자가 제네바에 찾아왔다. 세르베투스다. 그가 익명으로 출판한 “기독교의 회복”이라는 책에 삼위 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간이 신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삼위일체라는 것은 세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모독하였다. 칼빈은 그를 고발했다. 세르베투스가 주장한 핵심은 칼빈의 일관된 주장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 되신 참 하나님’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가까운 사람(homoiousios) 가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과 동질(homoousios)인 이 기본적 교리를 부정하고 새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아 죽기 전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고 운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인지, 거부인지 판단 할 수 없게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