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국공합작과북벌
- 최초 등록일
- 2009.06.09
- 최종 저작일
- 2008.05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4,500원
소개글
강좌중국사
목차
序 論
Ⅰ. 국민당의 개진과 소련의 중국혁명에의 접근
Ⅱ. 국민당(國民黨)의 개조(改組)와 국민혁명(國民革命)의 전개(展開)
Ⅲ.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성립(成立)과 왕장연합체제(汪蔣聯合體制)
Ⅳ. 북벌(北伐)과 무한국민정부(武漢國民政府)
結 論
본문내용
序 論
1924년 광주(廣州)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제 1차 전국대표대회는 소령의 지원과 지도를 받아들여 공산당원의 개인자격으로의 국민장 입당을 허용하고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와 농공(農工)에의 부조(扶助)를 표방함으로써 제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 되었다. 이 국공합작의 목적은 중국의 자립과 붇강을 목적으로 한 국민혁명(國民革命)을 실현하는데 있다. 국민혁명은 주로 군벌과 군벌에 의지하고 있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구체적 실행방법은 북벌(北伐)이었다. 본고에서는 국민혁명에 대한 혁명이론적 접근과 정치적․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외면적 접근을 서로 유기적으로 종합함으로써 국공합작으로 시작된 국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국민당의 개진과 소련의 중국혁명에의 접근
1916년 6월 원세개(袁世凱)가 죽자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거느린 손문은 약법체제의 회복을 내걸고 원(袁) 사후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서남군벌(西南軍閥)의 세력관계를 이용하여 1917년 9월 제 1차 광동군정부(廣東軍政府)를 수립하였다. 이같은 손문의 군벌과의 타협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토원운동이래 계속된 것이었다. 이 시기 손문 및 국민당지도자의 사상적 지향에는 5․4운동을 통한 대중운동에 대한 자각, 유물사관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이론의 수용, 일본제국주의와 북경의 군벌에 대한 비판, 직접 민주주의 채용, 그리고 중국의 주체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세계열강들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는 기간산업(基幹産業)을 국영화하는 방향에서의 `부원(富源)의 개발`등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었다. 손문은 1921년 4월 정식으로 제2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같은 사태진전에 발맞춰 1920년 당(黨)의 총장(總章)을 개정하고 당조직을 구체화하는 당무(黨務)를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손문은 무엇보다 일차적인 목표를 광동군정부를 근거로 광동을 혁명기지화해서 북벌, 즉 당시 북경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직예파군벌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손문은 북방의 정치정세에 대응하여 북벌을 실시 하지만 재정적 곤란으로 실패하였다. 1922년 6월 진형명의 반란으로 광동의 혁명근거지를 상실하고 상해에 도착한 손문은 곧바로 당세(黨勢)를 확장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예상하면서 개진(改進)에 착수하였다. 손문은 9월에 53명의 `재상해각성동지(在上海各省同志)`를 모아 당무개진(黨務改進)을 위한 좌담회를 열고 개진계획을 확정하였다. 다음해 1월 1일에는 `중국국민당선언(中國國民黨宣言)`이 발표되고 다음날에는 개진대회(改進大會)가 소집되어 당장․총장을 선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