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문왕의 개혁 및 사회변동
- 최초 등록일
- 2009.06.10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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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 문왕의 개혁 및 사회변동
목차
Ⅰ. 머리말
Ⅱ. ‘天孫’과 ‘皇上’칭호
Ⅲ. 문왕대의 개혁정책
1. 문치정책
2. 당문화의 적극적 수용
3. 유학과 불교의 진흥
4. 대외 관계의 변화
Ⅳ. 개혁에 따른 국력신장과 왕권강화
1. 고려국 호칭
2. 당으로부터의 진봉
3. ‘유신’과 전륜성왕 설화
Ⅴ. 말기에 드러낸 개혁의 한계
본문내용
Ⅰ. 머리말
제 3대 문왕 대흠무는 737년 무왕의 뒤를 이어서 즉위하여 793년 3월 사망하기까지 57년간이나 발해를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은 발해의 전체 존속기간에서 거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발해의 시조 고왕이나 그의 아버지 대문예가 무력을 바탕으로 대외정복을 주로 하였던 것에 반해, 문왕은 내부통치에 힘을 기울여 국가기틀을 확립하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왕의 시기는 대외교섭도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한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묘와 묘비에 대한 연구들도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문왕대의 사회변동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천손’과 ‘황상’이란 칭호에 주목하여 이들에 과한 기록을 정리해 봄으로써, 적어도 문왕 후기에 이들 칭호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하낟. 그리고, 그러한 칭호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왕대에 수행되었던 일련의 개혁정책들을 검토해보겠다. 다음으로 그러한 개혁정책이 결실을 맺으면서 나타나는 문왕 후기의 사회변동을 추적함으로써, 이 칭호들이 이러한 변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문왕 말년에 이르러 개혁이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던 상황을 그와 연계되어 나타나는 몇 가지 징후들을 통하여 추측해보도록 하겠다.
Ⅱ. ‘天孫’과 ‘皇上’칭호
문왕대의 사회변동은 이 당시에 사용되었던 ‘천손’과 ‘황상’이라는 칭호가 단적으로 상징해준다. 모두 황제에 합당한 칭호들로서 당시 발해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자신감을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록을 통해 천손과 황상에 대해 규명해보도록 하자.
천손이라는 말은 일본측 기록에 단 한번 나타난다. 일만복을 대사로 한 발해사신들이 771년 일본에 도착하였으니, 이것은 727년 국교수립 이후 일곱 번째의 사신행차였다. 이들은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