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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여기서 한국미인가 - 샤머니즘적 자유분방성, 한국인들의 무질서에 대한 동경

*수*
최초 등록일
2009.08.18
최종 저작일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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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속은 샤머니즘의 일종으로 무격을 중심으로한 종교 현상을 말한다.
샤머니즘은 수렵문화 단계인 구석기시대부터 존재하며 현세 긍정적이며, 현세 이익을 위한 종교로 상대적으로 내용의 변화가 적다.

한국의 무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신석기․청동기시대의 토제 또는 골제인형이 출토되고 있다. 각종 청동 의기(儀器)인 방울, 거울, 칼, 방패형 청동기, 원개형 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무구(巫具)와 비슷하며 점뼈(卜骨)은 직접적 종교 전문가가 출현하였음을 시사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정치권력의 등장을 설명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신화로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단군이란 칭호는 단골, 텡그리(tengri)로 석관묘에는 검(세형동검), 경(경문경), 옥(곡옥, 관옥) 등이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어 당시 지배자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천신을 중심으로 풍백, 운사, 우사 등 다양한 신령을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한 조선왕조로서는 당연히 무속을 배척하였으며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무당을 처벌하여 도성 밖으로 축출하였으며 동서활인서에 배속시키고 각종 무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부담을 지워 서울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으나 지방으로 갈수록 무속은 사회적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사림은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성하려 하면서 무속을 더욱 배척하였다. 무속 말살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하여 무격의 동서활인서 배속을 중지하거나 무세 징수 중지 등등을 주장하여 무속이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동제(洞祭)가 유교화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는 개인적 기능은 유지되었다. 도성 밖으로 무격을 축출하였으나 도성 밖에서의 무업은 인정하는 등 조선 왕조의 정책에도 모순이 있었다. 또한 각종 무세로 중앙관청 및 지방재정을 충당하고, 지방관이 무세를 징수하여 사복을 채우기도 하였다. 왕실에서도 장희빈 저주사건을 비롯한 각종 무고(巫蠱) 사건이 일어나고, 별기은 등이 계속되었다.

목차

Ⅰ.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
1. 해체되어가는 중세 봉건 사회
1-1. 비틀거리는 조선, 다시 서다
1-2. 이앙법의 보급으로 변화하는 농촌
1-3. 만들고, 팔고, 돈 벌고
1-4. 돈으로 사고 파는 양반
1-5. 모든 세금은 쌀이나 돈으로
1-6. 서울에서 정권다툼, 지방에서 향권다툼

2.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다
2-1. 실학과 사회 개혁론
2-2.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2-3. 서민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다
2-4. 조선 후기의 신종교와 사상

Ⅱ. 한국 무속사의 전개
1. 한국무속의 기원
2. 삼국시대
3. 고려시대
4. 조선시대

Ⅲ. 무신(巫神)의 존재성과 그 실체
1. 한민족의 무속적 기질
2. 무신의 존재성과 실체 - 신병과 신들림
3. 굿 문서(文書)를 통해본 무속 세계
4. 무교의 좋은 곳

Ⅳ. 굿, 그것은 삼신세상을 만들어가는 방편이자 길!

본문내용

Ⅰ.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

1. 해체되어 가는 중세 봉건 사회

1-1. 비틀거리는 조선, 다시 서다

16세기를 지나면서 농업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각 지방에 장시가 생겼으며, 관리에게 수조권을 나눠주는 과전법이 붕괴되고 지주 전호제가 계속 확대되었다. 군역의 포납화와 공물 제도에서 방납이 새로이 나타났고, 중앙 정치는 훈구파 대신 사림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노비의 도망을 비롯한 전국적인 인구이동으로 사회가 크게 흔들렸으며 전국의 많은 토지가 황폐하게 되었다. 군공이나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한 자들이 많아 양반 사족의 지배 기반을 크게 약화시키는 한편 신분제를 흔들리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쟁을 통하여 주변 및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졌고, 청에 포로가 되어 갔다가 돌아온 이들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두 차례의 난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왕실의 권위가 크게 꺾였다. 이는 황폐된 토지를 새로이 개간하여 지주로서 기반을 다지고 유향소나 서원을 통해 집단을 이룬 지방 사족들을 바탕으로 붕당 정치가 순조롭게 펼쳐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비변사의 정치적인 기능이 강해졌고, 지방의 사림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이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다퉜다. 중앙군의 핵심인 훈련도감이 직업 군인 위주로 바뀌어갔고, 방납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됐으며, 평민만의 신역이 된 군역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비변사는 중종 때 변경의 방비를 위해 임시로 둔 기관이었다가 임진왜란 때 문무 고관의 협의 기관으로 바뀌어 국가의 모든 주요 업무를 다룸으로써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상설기구가 되어 19세기 고종 초까지 유지되었다. 비변사의 권한은 커졌으며, 상대적으로 왕의 전제적인 권한은 약해졌다.

군역이 16세기 말에는 사실상 면포만 내게 되어 군사력의 알맹이가 없어졌다.
선조 27년(1594)에 훈련도감을 새로 설치하고 포수, 사수, 살수 등 삼수병을 양성하였다. 지방에서는 평민과 천민을 함께 묶어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속오군에 평민과 천민을 함께 묶은 것은 신분제가 해체되어 감을 보여준다. 훈련도감은 무기가 화포 위주로 바뀌어 전문적인 군인이 필요해짐에 따라 급료를 주고 고용하는 장번의 직업 군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의 5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과 지방의 속오군이 핵심적인 군대가 되었다.

참고 자료

1. 굿의 사회사 - 주강현(웅진)
2. 굿, 그것은 삼신세상을 만들어가는 방편이자 길! - 박흥주(굿연구소 소장)
3. 한국 무속사의 전개 - 경기문화재단
4. 무신(巫神)의 존재성과 그 실체 - 양종승(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한국무속학회 회장)
5.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2 ; 고려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 - 역사문제연구소(웅진)
6. 2003 전통문화가 중요하다 - 새세기에 듣는 한국문화와 예술(최준식, 한국문화표현단)
; 한국문화의 통합적 총론-한국문화․한국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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