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에 대한 역사
- 최초 등록일
- 2009.10.31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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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우리의 수도인 서울을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원나라 군대가 주둔한 이래 조선조 말 청나라 군대, 식민지기간의 일본군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방 후 자유를 되찾기는커녕 미 점령군이 한반도를 독차지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닌 종속의 관계로 유지되어 왔다. 여기서 미국이 우리나라에게 어떠한 나라였는지 알아보자.
조선 말, 우리나라는 철저한 쇄국양이 정책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의 접촉이 없던 시기에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과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신미양요다.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가 조선을 쳐들어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병인양요’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 오페르트는 독일 상인으로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계속 거절당하자 밤중에 남연군묘를 도굴하고자 시도하였으나 곧 퇴각하였다.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지극히 신성시하였던 조선에서 병인양요로 인해 ‘양이’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이로써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洋夷)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의 침공이 있었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다. 이 사건의 원인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만경대 부근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고, 이들은 노략질과 인명을 살상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박규수가 이들을 공격하여 배를 전소시켰다. 사건 발생 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군민에 의해 소각된 것으로 확신하고, 이 기회에 함포외교로 조선을 개항시켜 조약을 체결코자 원정함대를 편성하였다. 양군 사이의 1차 전투는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조선은 이들을 퇴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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