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 최초 등록일
- 2010.05.13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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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1919년 6월 28일에 맺어진- 베르사유조약 제80조와 같은 해 9월 10일에 조인된 생제르맹조약 제88조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보전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지속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내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최대의 난제로 대두되었다.
목차
1. 서론
: 제1차 세계대전 후 중부유럽의 상황
2. 본론
2-1. 1936년의 독일·오스트리아 협정
2-2. 1937년의 국제정치 상황
2-3. 히틀러·슈슈니크 회담
2-4.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Anschluss Osterreichs)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 제1차 세계대전 후 중부유럽의 상황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1919년 6월 28일에 맺어진- 베르사유조약 제80조와 같은 해 9월 10일에 조인된 생제르맹조약 제88조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보전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지속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내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최대의 난제로 대두되었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오스트리아 내의 나치 세력의 친독성향이 강해졌으며 많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돌푸스(E. Dollfuss)는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내의 나치 세력을 탄압하고 억압함으로써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같은 해 6월 19일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에 해산을 명령하였고, 빈에 있는 독일 외교관을 추방하기까지 한다. 이는 나치세력에 의한 반(反)오스트리아 폭력사태를 촉발시켰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관심을 이끌게 된다. 왜냐하면 무솔리니는 1935년 1월에 이디오피아에 관한 프랑스·이탈리아 조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3. 결론 :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의 의미
3-1. 베르사유 조약의 초석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독일은 중부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2. 독일의 팽창은 유럽전체의 세력균형의 파괴를 의미하였으며, 체코와 발칸에 위기를 초래하였다. 비엔나를 장학함으로써 발칸의 입구에 독일이 서있게 되었고, 체코 영토의 절반이 독일의 포위에 들어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3-3. 독일과 이탈리아가 접경하게 됨으로써 프랑스는 발칸지역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의 안전보장체제에 위협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출판부, 2006.
오기평. {세계외교사}. 박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