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쿠데타와 광주항쟁
- 최초 등록일
- 2010.06.16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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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열심히 한겁니다ㅋ
목차
전두환 등 신군부의 쿠데타
-서울의 봄
5․18 광주 민주 항쟁
의문점1)왜 하필 광주에서일까?
의문점2)미군의 책임?
의문점3)5․18민주화운동의 영향은?
마지막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나의 생각
본문내용
전두환 등 신군부의 쿠데타
박정희가 살해당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11월 24일 400여명의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은 서울YMCA강당에 모여 유신체제 완전 철폐를 외치며 조기 개헌, 조기 총선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일명 YMCA위장 결혼 사건)허나 최규하는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으로 이에 대응(?)했고 신군부는 YMCA회합 참가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하는 등 이들이 권력의 실체가 어디인지 가늠케 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군부에는 두 세력이 있었는데 박정희 서거 후 양자는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정승화 등 상층세력은 유신체제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전두환 등 “하나회”세력은 유신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들은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체포하는 하극상을 벌이며 군부를 장악하였다. 이후 신군부는 상당기간 권력에 정면에 나서지 않으며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1년 쿠데타 세력이 4∙191주년을 맞아 시위가 격화될 것을 예상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처럼, 신군부도 그와 같이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봄
(10∙26사태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단행하기 전까지 정치적 과도기)
이때까지 한국은 긴급조치로 일관된 정치의 암흑기였는데, 10·26사건을 계기로 암울한 유신체제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민주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넘쳤다. 이 시기 동안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불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합된 힘을 보여 주지 못했으며 학생들은 미약한 학생운동 역량을 강화시키는데 주력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서울의 봄은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김종필과 이후락, 김대중 문익환 등을 연행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와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며 시위를 벌였던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면서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