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종교개혁
- 최초 등록일
- 2010.09.04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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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역사』
그리스도교의 여러 분파중 하나인 성공회는 16세기에 발생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유래하였다. 성공회란 “거룩한 공회”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함께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다른 여러 종교개혁에 비교하여 종교적인 요인보다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요인들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동기로 더 많이 작용했다.
목차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역사』
『카톨릭의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본문내용
그리스도교의 여러 분파중 하나인 성공회는 16세기에 발생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유래하였다. 성공회란 “거룩한 공회”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함께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다른 여러 종교개혁에 비교하여 종교적인 요인보다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요인들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동기로 더 많이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헨리 8세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충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나 이혼의 문제로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시작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1532-1534년 사이에 7개의 법령을 국회에 통과시킴으로서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1534년에는 “수장령”을 발표함으로써 교황과는 이제 함께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의 종교개혁은 초기에는 “국가 행위”로 주로 헌법적인 변화가 주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라틴어 성서 대신 영어 성서를 비치하였으며 잉글랜드교회의 교리 및 예배 방식의 기준이 되는 “10신조, 6신조”를 공포함으로써 교회의 교리에 있어서도 변화를 꾀하였다. 그를 이어 에드워드 6세는 그의 아버지보다 프로테스탄트의 색채를 더 많이 띠면서 개혁운동의 가속이 붙었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성격을 지닌 “42신조”가 새롭게 발표되이것은 후에 생겨난 감리교의 교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은 메리 여왕으로 잉글랜드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돌려놓았다. 1554년에 1528년 이후의 모든 교회 입법을 무효화 한다는 것과 이단을 처벌하는 구법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으로 그 때부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의 이러한 철권통치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후에 왕위를 이어받는 엘리자베스로 인해 잉글랜드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도의 길’을 택함으로 잉글랜드교회에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엘리자베스의 타결정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힘든일이다. 교황으로부터, 청교도들로부터 여러 위협을 받음으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나 제네바로부터의 영향을 지켜내려 하였다. 엘리자베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청교도에게나 교황주의자들에게 호감이 없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잉글랜드국교회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킹 제임스 성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잉글랜드교회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결국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구성된 의회군에 의해 참수를 당하였고 공화정(1649-1660년)을 거쳐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제임스 2세를 거치며 카톨릭에 가까운 왕권파와 프로테스탄트에 가까운 의회파의 충돌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도시에서는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시골에서는 오히려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