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사건
- 최초 등록일
- 2010.10.07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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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현대사-서안사건
목차
없음
본문내용
5. 2차 국공합작(1937.9~1945.8)
-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은 전민족 입장에서 `일치항일`을 희구하는 대다수 중국민중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장개석이 공산당의 협상책임자인 주은래에게 내전의 중지를 약속한 것을 계기로 내전의 기본적인 정지와 국·공간의 지속적인 정식회담의 길을 터주었다.
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 후 약 1개월 여 간은 서안사건의 마무리 기간이었다. 국민 정부는 우선 서안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장학량에 대해 군사재판에서 징역 10년과 5년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하였다. 장개석이 국민정부에 특별사면을 요청하여 장학량은 사면되었으나, 석방되진 않았고 장기간의 구금상태에 들어갔다 또한 국민정부는 1937년 1월 5일 동·서북군을 감숙성(甘肅省)으로 이동시키고 섬서성(陝西省)에 중앙군이 주둔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서북문제 처리 방침을 발표하였다. 서안에서의 내분과 약간의 저항이 있었으나 중앙군은 1937년 2월 8일 서안으로 진입하여 이를 해결했다.
참고 자료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편, 백영서,1989,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정과 그 의의」,
『강좌중국사 Ⅶ』, 지식산업사.
• http://chinahistorio.com/board/bbs/gnuboard.php?bo_table=lecture_13&wr_id=5912
• http://mybox.happycampus.com/asy0629/177165/?agent_type=naver
• http://100.naver.com
• http://www.encyb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