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이육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시인론을 작성한 것 입니다.
목차
1. 서론
2. 이육사의 생애
3. 이육사 시에서의 공간의 인식
4. 이육사 시에서의 낭만성
5. 이육사 시에서의 철학성
6. 맺음말
7.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이육사는 36편의 시를 발표하고 40세의 짧은 생을 마치고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에 베이징의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남긴 시가 36편뿐이기 때문에 시집은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이 전부이다. 그의 시는 23편이 생전에 발표된 시들이고 나머지 13편은 사망 후 유고시이거나 그 게재지가 밝혀지지 않은 작품들이다.
적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아직까지도 교과서에 실리고 민족 시인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을 보면 그의 인생과 시인으로서의 인생이 짧지만 강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삶이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감상하는데 영향을 주어 편협하게만 바라보도록 이끌었을 수도 있다.
본고는 작가를 독립투사 이육사가 아닌 시인 이육사의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잇도록 그의 작품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 해 보고자 한다.
2. 이육사의 생애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3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를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참고 자료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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