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작성
- 최초 등록일
- 2011.12.20
- 최종 저작일
-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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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사합니다
목차
농업의 변화
상업의 변화
서민 문화의 발달
예술면
문학면
종교면
생활면
신분제도
토지제도
수취제도
본문내용
농업의 변화
(1) 왜란과 호란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인 농촌이 황폐해졌다. 따라서 나라와 백성들은 농촌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2) 나라에서는 농토를 늘리고 수리 시설을 보완하여 많은 수의 크고 작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이 가장 큰 저수지로 손꼽힌다.
(3) 농민들은 개량된 여러 농사법을 실천해 보는 등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였다.
① 이앙법의 보급 : 이앙법(모내기)은 논에다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과는 달리 모판에서 모를 길렀다가 논에 옮겨 심는 것이다. 가뭄에 취약한 약점이 있어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으나 수리 시설이 보완되고, 수확량이 많은 반면 제초 횟수가 적고 수월하여 노동력이 훨씬 절감되며 (20명이 필요했던 것이 3명 정도로 줄어듦),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동안 농토를 그만큼 더 이용할 수 있기에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② 견종법의 보급 : 견종법은 이랑에다 작물을 심는 농종법과는 달리 고랑에 심는 것으로 바람을 막아 종자를 보호할 수 있는 등 밭농사에 특히 효과가 커서 보리와 밀농사에 유용하였으며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수확의 증대와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왔다.
③ 시비법의 개발 : 시비법은 비료의 양과 질을 높인 것으로, 인분의 이용 및 비료의 종류도 다양해져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드는가 하면, 가축의 분뇨를 이용하고 벼나 보리의 짚을 태워서 토양의 유기질을 늘리고 질소 성분을 증가시켰다.
④ 구황 작물의 생산 : 가뭄이나 장마에 영향을 받지 않아 기름지지 않은 땅에서도 가꿀 수 있어 흉년으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으로 대용할 수 있는 구황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구황 작물인 고구마는 일본에서, 감자는 청에서 각각 도입되었다.
⑤ 농민층의 계층 분화 : 새로운 농법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고 노동력이 절감 되는 속에서 1인당 경지 면적이 확대되어 빈부간의 계층 격차가 커졌다. 또한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토지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양민의 토지를 약탈하는 경우도 늘어나 소작농이나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으며 일부는 농촌을 떠나기도 하면서 농촌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