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에서 법궁이 되다! 창덕궁 답사기 레포트 A+
- 최초 등록일
- 2012.06.21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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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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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창덕궁은 어떤 궁 인가?
창덕궁 소개
창덕궁은 왜 지어졌는가?
창덕궁의 규모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과 관련된 역사물
Ⅱ. 창덕궁 답사 계획
21세기 새로운 시대, 시대 활용하기
Ⅲ. 창덕궁 답사 과정
창덕궁의 시작,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조선 왕의 첫관문, 인정문
인정전 품계석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 선정전
낯설게 느껴지는 서양식 가구, 희정당
경술국치, 비극의 현장, 대조전
세도정치의 왕의 소박한 서재 낙선재
르네상스 왕,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Ⅳ. 창덕궁 답사 후기
본문내용
Ⅰ. 창덕궁은 어떤 궁 인가?
창덕궁 소개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착덩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옹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제로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워 6일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 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창덕궁은 왜 지어졌는가?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건되었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이궁의 양궐 체제가 된다.
창덕궁의 규모
내전이 주요 건물과 그 부속 건물을 합해서 77칸과 이에 딸린 실무용 건물이118칸 해서 195칸이며, 그 외에 편전과 정전 등 주요건물과 이에 딸린 건물들을 모두 합하면 전체가 287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 궐내각사나 궁성문, 그리고 그 밖의 필요한 공간이 아직 지어지기 전의 기록으로 1827년 전후에 제작한 동궐도와 1907년 무렵에 작성한 궁궐지 및 그와 함께 제작된 북궐도형, 북궐후원도형, 동굴도형 등의 도면을 종합해 보면 1907년 무렵 당시 창덕궁의 내부에 남아 있는 전각이 1,731.75칸, 없어진 것이 10칸이며, 기타 대보단 지역가지 합하면 모두 1,839.25칸이었다. 창경궁에는 남아 있던 것이 2,379칸 없어진 것이 304칸이며, 후원에는 전각 254칸과 정자 다섯 곳이 남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