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의 전황과 그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2.07.23
- 최종 저작일
- 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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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기서는 6·25 전쟁 개전 초기, 전쟁 상황과 춘천·홍천 전투의 전황, 성공요인 및 그 전투의 의의 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기습을 당한 개전 초기 전황
1)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 발발
2) 개전 직후의 우리 군의 긴박한 상황
3) 북한 남침의 명백한 증거
2. 개전 초 6사단의 춘천전투
1) 북한군의 기습공격계획
2) 국군 제6사단의 방어계획
3) 북한군의 남침공격을 서울에서 3일간 지체시킨 춘천전투
4) 춘천 홍천지구 전투의 결과
5) 춘천전투의 성공요인과 교훈
Ⅲ.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올해는 6·25 전쟁 62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은 영원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민족적 상처요 아픔이며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없는 참상이요, 최대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호국 영웅들이 국가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筆生則死)’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싸워서 승리한 전쟁이었다. 결코 슬픔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위대한 역사였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5시경 잘 훈련된 북한 인민군은 T-34형 소련제 탱크 150여대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개시함으로서 6?25 한국전쟁이 개전되었다. 북한국은 4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40일 만에 부산을 중심으로 반경 90km 이내의 경남북을 제외한 전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군의 처절한 40일 동안의 낙동강 방어전투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탈환 - 38선 돌파 - 평양함락 - 압록강`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으나 중공군 2개병단(야전군 급)의 참전으로 후퇴했고 이듬해 `1 4후퇴 - 3월 서울 재탈환 - 휴전회담 개시와 고지쟁탈전`을 거치면서 3년 1개월 만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 략>
5) 춘천전투의 성공요인과 교훈
국군 제6사단의 작전 행동을 돌이켜 보면 사단의 성공적 방어전투는 평시 전투준비와 전투시 지휘관의 효과적인 전투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① 사단이 전쟁 발발 전에 교육훈련에 힘을 쏟은 결과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른 사단은 부대 업무 때문에 고등군사반 교육 파견과 같은 임무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던 반면, 제6사단의 지휘관들은 장교들에게 적극적으로 고등군사반 교육을 이수하도록 격려했다. 교육받은 장교들은 군사교육을 마치고 난 후 자신들의 업무 수행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훈련에도 열성이었다.
② 전시의 혼란에 직면에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들이 침착하게 전장 상황을 파악하고 적시적절한 결심을 내린 것도 국군 제6사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6월 26일까지 주진지에서 저항하다가 이날 오후 적의 포격이 심해질 무렵 우두산 방어를 고집하지 않고 소양강 남안 진지로 부대를 후퇴해 소양강을 장애물로 하는 방어를 결정한 것은 적절한 시간에 준비된 방어진지로 자진 철수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면서 방어의 유리점을 잘 활용한 결정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