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2012.11.25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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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훈영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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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사상
우선 처음에 이 리포트의 주제를 받고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 해방 당시 민족의 최고 지도자였던 여운형 선생에 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참. 그래서 이번기회에 오직 김구 선생만 알고 있던 내 역사적 관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여운형 평전’을 구해 읽어보았다.
가장 먼저 여운형의 출생과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왔고, 무엇을 중요시하며 배웠는지가 사람을 가장 빠르게 파악 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민족주의자 여운형(호는 몽양)은 1886년 5월 25일 정오, 경기도 양근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의 양반가문인 함양 여씨 경파 여정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최초의 일본통신사였던 여우길의 10대손이며, 어머니 경주 이시도 왜란 때의 공신 이항복의 11대손으로 “양평의 명망가” 출신이다.
<중 략>
그는 해방 직후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좌익과 우익, 노동자와 자본가, 미국과 소련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만 보아도 여운형이 얼마나 시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고, 포용력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요즘 시대만 하더라도 나의 이념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군다나 현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들었을 그 당시에는 상상 하기 조차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몽양 여운형은 청년들을 사랑하고, 나아가 민족을 사랑한 따뜻한 인물 이었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창건했는데, 이들은 이름과 거처를 말하지 않고, 문서를 남기지 않는다는 3불맹서를 철칙으로 삼았다. 이는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희생에 대비하여 이러한 체제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이 모임에는 청년이 아닌 노장들만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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