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면호 사건부터 신미양요까지를 통해 본 서구 열강의 침략 의도 해양사적 사건과 박규수의 입장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2.12.10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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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2-1.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동진진 설치
2-2. 병인양요의 개요와 박규수의 입장
2-3. 와츄세트호 내항의 의미
2-4. 신미양요의 개요와 박규수의 입장
3. 마치며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짓이다.’ 라는 글귀가 새겨진 척화비는 1871년 4월 25일 서울 종로와 각 도회지에 세워졌다. 이 척화비는 ‘흥성대원군의 척화 방침’을 천명하는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1870년 초반 조선의 서양 열강들에 대한 태도는 개방이 아니라 척화였다. 그렇다면 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상황이 어떠했는가? 이미 청은 난징조약, 텐진조약, 베이징 조약을 통해서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일본 역시 1858년 미일수호조약 등을 통해 외국에 대해 개방을 표한 상황이었다.
<중 략>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박규수는 중국과 일본이 강화를 허락한 것처럼 조선도 화친하자는 주화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대원군의 양이책에 대한 지지 역시 보여준다. 이밖에도 동진첨사 이종원에게 대동강 입구 급수문에 토성을 쌓고 방어하라고 지시하는 등 화친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하고 있다.
9월 18일 문수산성에서의 첫 교전에 이어,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두 번째 교전이 발생했다.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장기간 점령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순무천총 양헌수가 5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몰래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할 작전을 세운다.
<중 략>
결과적으로 조선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서구열강으로부터 자국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국을 지킨 것’인지는 몰라도 과연 ‘자국을 위한 것’인지는 한 번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진정 조선을 위한 길이였을까? 흥선대원군과 박규수를 비롯한 여러 충신들은 이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토대로 신미양요 때까지 주도적 생각은 ‘보수’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조선 시대의 개화파라고 평가받는 박규수의 한계일 것이다.
참고 자료
권태억,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역사비평가, 2005
이이화,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열강』, 한길사, 2003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