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민족의 저항
- 최초 등록일
- 2013.04.21
- 최종 저작일
- 2012.09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일제시대 특히, 1920년대의 민족의 저항운동에 대한 리포트 입니다
실력 양성 운동 및 각종 사회 운동에 대하여 충실히 작성하엿습니다
목차
⊙실력양성운동
⊙학생·청년운동 →사회주의 확산 - 독서회
⊙사회주의
⊙신간회
⊙노동운동·농민운동
⊙형평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
본문내용
⊙실력양성운동
3.1운동을 통해 대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지금 당장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수많은 지식인들은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1920년대에는 수많은 실력양성운동이 발생하게 되었고, 대표적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의 활동과 당시의 등장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이전의 독립운동보다 더 격렬한 사회적 저항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실패 이후 패배주의에 빠진 지식들은 사회개조론이나 신문화 건설을 주장하는 등 친일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20년대 민족분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친일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이 주장한 내용은 조선의 자치로서 이들을 자치론자 또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칭했다.
자치론자의 대두로 인해 일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당시의 성장하고 있던 사회주의 단체와 결합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27년 신간회가 발족하게 되고, 좌우합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1920년대의 독립운동을 신간회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신간회의 의미는 매우 크다.
<중 략>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하였다. 형평사 운동은 일본의 수평사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수평사 역시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다. 이들은 주로 삼남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운동 방식으로는 고기 불매 운동을 일으켰고, 사회주의자·언론사에 협조를 받아 운동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이에 1930년대 초 백정 신분을 표시하는 것을 일본에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후에 형평사는 경제적 이익으로 탈바꿈하여 도살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이익집단으로 변모하였다.
2.소년운동
소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소년단체의 조직은 서울보다 지방인 안변, 진주, 광주, 왜관 등에서 먼저 결성되었다. 그러나 소년운동의 전개는 1921년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의 지덕체를 발육시킬 목적으로 청년회 내에 소년부를 두었을 때부터로 천도교 소년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