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정리
- 최초 등록일
- 2013.04.26
- 최종 저작일
- 2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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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봉산탈춤 특징
2.양주별산대 특징
3.봉산탈춤과 양주별산대 비교
본문내용
탈춤이란?
탈춤은 18세기 이후 새로운 상황에서 밑으로부터 대두한 혁신의 움직임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예술 형태이다. 농민 문화의 뿌리를 상인과 이속이 가담해 키운 결과, 모두 함께 어울려 노는 노동 놀이를 기반으로 해서 지배 체제의 허위의식을 다각도로 비판했다.
19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이르렀다가 외세의 침투로 인한 사회 변화 때문에 위축되기 시작했고, 일제 강점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1911년 밤에 함부로 노래 부르거나 춤을 추면 즉결 처분으로 처벌한다는 명령을 공포 했다. 1920년대는 문화통치로 제한된 범위 안에 사전 승인을 받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탈춤이 되살아나기 어려웠다.
1936년 봉산 탈춤 공연은 전국적인 관심거리가 되었지만 대세를 놀려놓지 못한 채 암흑기를 맞이했다.
1960년대 후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었고 1970년대부터 탈춤 재흥의 시기를 맞이했다.
1.봉산탈춤
1).봉산탈춤의 개관
봉산탈춤은 황해도 일대에서 놀아오던 탈놀이 가운데 내륙의 평야지대인 황주, 서흥, 봉산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탈춤으로서 해안지대인 해주, 옹진, 강령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강령탈춤과 함께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탈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봉산 탈춤의 중흥자로는 약 200년 전의 봉산의 이속 안초목으로 일러오는데, 그가 전남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으며,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주로 이 놀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놀이에는 없고 봉산 탈춤에만 있는 사자춤 과장도 약 80여년 전에 새로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구전으로 미루어 보아서 봉산 탈춤은 200여 년 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또 다른 지방의 탈춤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개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산탈춤(북방계) 해서지방의 대표적인 탈놀이로 춤이 주가 되고 춤사위가 활발하여 몸짓과 재담, 노래로 이루어진다. 쓰이는 악기는 피리, 젓대, 북, 장구, 해금 등이며 장단은 염불 장단, 타령장단, 굿거리 장단 등이다. 배역은 36역이고, 26개의 종이로 만든 탈이 있으며 10개는 대용한다. 모두 7과장 5거리로 짜여져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