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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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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의미
Ⅲ.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배경
1. 객관적 배경
2. 정치적 배경
Ⅳ.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전개
Ⅴ.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의식구조
Ⅵ.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6 29선언
Ⅶ.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노동운동
Ⅷ. 향후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인식전환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947년 2·28사건을 통하여 대만인들의 저항을 폭력으로 제압한 가운데 48년 대만으로 이전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권을 개방하지 않는 독재체제로 국공 긴장을 빌미로 계엄령으로 정권을 보강하고 있었다. 자유중국을 표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인민은 기본권의 제약 속에 그들의 민주적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적 결사체를 가질 수 없어 민주화 운동은 소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몫이 돼버렸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야당 결성을 목표로 잡지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주장을 구체화하는 조직을 모색하였지만 반국가 음모, 간첩활동의 죄목으로 번번이 좌절당하였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대만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시민세력의 성장으로 대만인들의 민주화 욕구도 그만큼 상승하였고 대만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도 때마침 변화하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배외적인 문혁세력이 후퇴하고 개혁 개방을 표방하는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개선될 조짐을 보여 대만정부와 대만인민의 새로운 대응이 필요한 시기였다.
<중 략>
당외세력의 집결체인 미려도 측은 당국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1979년 12월 10일 인권집회를 강행했고 이를 저지하는 진압부대와 3차에 걸친 충동 끝에 상당한 규모의 부상자를 낳았다. 당국은 10월 13일 당외세력에 대한 대량검거를 행하여 152명을 반란죄로 체포하고 미려도 잡지를 정간하고 그 지부를 폐쇄하였다. 12월 19일에는 정부 비판잡지 [하조], [80년대], [춘풍]을 정간하였다.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군법회의를 통하여 당외세력에 대한 법률적 폭압을 행하여 황신개 14년, 시명덕 무기징역, 기타 12인은 12년의 징역에 처하고 나머지 33인은 6년에서 10개월에 이르는 실형에 처하였으며, 고준명 등 10명을 은닉죄로 처벌하고 나머지 체포자는 보석하였다. 당외세력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 구속자의 한 사람인 임의웅의 모친과 두 딸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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