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5해방(8 15광복)의 과정, 8 15해방(8 15광복)의 인식, 8 15해방(8 15광복)의 남북한교역, 8 15해방(8 15광복)의 국경일(광복절),바람직한 자각의식
-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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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8 15해방(8 15광복)의 과정
Ⅲ. 8 15해방(8 15광복)의 인식
Ⅳ. 8 15해방(8 15광복)의 남북한교역
1. 8?15 직후 남북한교역 실태
1) 남북한교역 일지
2) 남북한교역의 규모
2. 남북한 교역의 특징
Ⅴ. 8 15해방(8 15광복)의 국경일(광복절)
Ⅵ. 향후 8 15해방(8 15광복)의 바람직한 자각의식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되었다. 잔혹한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도 독립과 자유를 위한 우리 민족의 대장정이 끈질기고 치열하였기 때문에 해방을 맞이한 감격은 눈물겨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우리 민족에게 해결해야할 당면한 과제가 너무나도 시급하였다. 그것은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로 왜곡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사회제도를 바로 잡는 것부터 일제에 협력하여 우리 민족을 고통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침략자 일제가 물러갔는데도 한반도는 우리 민족의 뜻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은 채워지지 않았고, 식민지 잔재는 청산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남북분단이라는 또 다른 민족사적 비극이 시작되었다.
채만식의 <논 이야기>는 구한말부터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근 50여 년 동안 한 농토의 소유권이 세 번씩이나 바뀌게 되는 사연을 통해 자기 땅을 가진 평범한 농민이 구한말의 봉건적 수탈과 식민지 초기의 토지 정책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 경과와 그 소작농이 해방 이후에도 소작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내력을 그리고 있다.
<중 략>
임정은 최초의 공화제 정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정부란 명칭에 걸맞게 전체 민족운동을 지도하지 못하고 단위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하여 갔다. 상해임정이 실질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1920년대 초까지였으며 국민대표회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임정의 노선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하여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게 되었다. 1941년에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보면 보통선거제의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지방자치제의 실시, 국비교육,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임정은 외교 독립 노선의 한계를 인식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무장투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무장독립군 조직을 추진하여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김호일, 8·15 해방의 역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9
김삼웅, 8·15광복의 의미와 통일과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2010
신주백, 해방, 광복, 한국역사연구회, 2006
유임하, 다시 돌아보는 8·15 해방의 의미와 그 현재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
윤경로, 8·15해방과 분단에 대한 역사적 이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편집부, 8.15광복과 국토분단 그리고 정부수립, 북한연구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