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프랑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영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본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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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프랑스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영국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본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임정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상해를 벗어나 피난길에 접어들었고, 항주 진강 남경 장사 유주 기강 등으로 옮겨 다니다 1940년 중경에 정착하였다. 이 기간 임정 자체의 활동은 국내와 연락두절, 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정책의 성공, 한인단체들의 내부분열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중국과 유럽에서 전쟁이 격화되고 세계대전이 임박하자 임정이 가진 ‘망명정부’라는 조직형태가 중국 미주의 독립운동계와 관련국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관내의 한인단체들은 1940년대에 들어 임정을 중심으로 결집되기 시작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김약산 김규식의 민족혁명당계가 임정 내부로 들어옴으로써 일단 임정을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 중국 관내 한인단체들의 임정으로의 결집에는 내외정세의 격화에 따른 역량결집과 통일행동의 필요성도 있었지만 임정이 이전부터 누려왔던 독립운동 최고본부로서의 명망성, 임정에 대한 연합국의 정부승인과 재정 군사원조의 가능성도 크게 작용하였다.
<중 략>
그뒤 1921년 3월에는 평양지법에서 평안북도 연통제에 관련되어 姜時鳳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金鳳瑾 黃龍起 朴承大가 4년형, 鄭寅奎 崔有鉉 林鍾衡 金雲鉉이 2년형, 그리고 曹榮杰이 1년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초기 임시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시행한 연통제는 교통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제로부터 우심한 견제와 탄압을 받아 그 조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연통제가 비교적 활발하게 기능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변경지방의 경우에는 그만큼 탄압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에는 1919년 7월 연통제 시행 이후 1920년 말에 이르면 그 조직이 와해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통제의 명맥은 적어도 1921년 전반기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되고 있었다. 1921년 2월 21일자로 함경남도(韓永鎬)와 경기도(閔哲勳), 그리고 충청남도(李起祥)의 독판이 임명된 사실과, 같은해 3월 23일 현재 ‘평북독판대리 金承萬’이라는 연통제 직함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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