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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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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의미
Ⅲ.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의의
Ⅳ.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
1. 성격규정의 결여
2. 법적 책임 구성의 결여
3. 진실규명차원과 정의구현차원의 구별문제
4. 위원회의 구성문제
5. 죽은 자의 차별문제
6. 군사재판
Ⅴ.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정부역할
Ⅵ.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진상규명운동
Ⅶ. 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언론보도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9월부터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반도들을 포착하지 못했는데 이는 산중에 피난 왔던 주민들이나 첩자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토벌대의 동태를 신호로 알렸을 뿐만 아니라 작전계획이 누설되었기 때문이었다.
경비대는 10월에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경비대는 물론 해군함정 및 경찰까지 통합지휘토록 하는 한편 제5여단 예하인 여수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제14연대 병력이 제주도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남로당 전남도당은 푸락치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에게 반란을 지령하였다. 지령을 받은 지창수 상사는 출항 전날인 10월 19일 밤에 저항하는 장교들을 사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여수와 순천 및 그 일대를 점령하여 공산천하를 만들고 수많은 경찰 및 우익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이 반란은 9일만에 진압되었으나 잔존반란군은 지리산 일대로 입산하여 상당기간 저항하였다.
<중 략>
미군이 베트남전쟁 때 한 마을을 덮쳐 주민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 유형의 양민 집단학살은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연행한 뒤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모조리 총살했다. 또 얼굴이 고운 젊은 여자들만 따로 불러내 성폭행한 뒤 역시 학살했다. 그 때 희생된 사람이 157명에 이른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왜 그들이 그처럼 허망하게 죽게 됐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주민들은 몇 년 전부터 사망 이유라도 알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해답을 주는 기관은 아무도 없다.
참고 자료
김창후 -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 미국 자료, 제주4.3연구소, 2002
김순태 - '제주4·3사건 위원회'의 활동과 평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3
이재승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평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4
제주4.3연구소 - 4·3역사문화 교육연수프로그램, 2010
허상수 - 정부보고서 확정 이후 제주 4·3운동의 방향과 과제, 제주4.3연구소, 2003
허상수 - 제주 4.3 사건의 진상과 정부보고서의 성과와 한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