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의 개혁
- 최초 등록일
- 2013.05.12
- 최종 저작일
- 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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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격화하는 재정위기
1) 재정의 피폐
2) 지이(支移)와 절변(折變)
3) 불가피한 재정개혁
4) 왕안석의 경력
3. 왕안석의 신법
4. 개혁의 좌절
1) 신법에 대한 반격
2)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
5. 나오며
참고 - 왕안석의 개혁 내용(표)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문(文)을 앞세울 것인가,무(武)를 앞세울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마도 권좌에 앉아 있는 자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권력의 위태로움을 맛보았던 경우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특히 송의 경우 지나치게 文을 강조하여 결국은 강남으로 밀려나 는 운명을 맞이한다.
송왕조는 오대분열 (五代分裂)의 뒤를 이어 태조(太祖 : 960976)태종(太宗 : 976997) 의 2대 사이에 집권적 관료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소위 문치주의 정책을 취했는데,인종(仁宗 : 1022~1063)때가 되면서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그 모순이 현저하게 노출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왕안석(王安石 : 1021~1086)이다.
여기서는 왕안석이 개혁을 단행해야 했던 사회적 배경과 개혁의 내용 및 그 의도, 개혁후 정치상황을 서술하고자 한다.
<중 략>
4)왕안석의 경력
왕안석은 지금의 강서성에 위치한 무주(撫州) 임천현(臨川縣)의 관료집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인 왕익(王益)은 지방관으로서 중국 각지를 전전했을뿐 중앙정부에는 들어가지 못한 하급관료였다. 고향인 임천현에는 하루의 목숨을 기댈 만큼의 경작지도 없었으므로 왕익은 가족을 이끌고 근무지를 전전했다. 왕안석이 태어난 곳도 임천현이 아니라 같은 강서 지방에 있는 임강군(臨江軍)이었다. 머리가 좋았던 왕안석은 17세 무렵까지는 당시의 수재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경제 등의 현실문제를 일체 돌아보지 않고 뛰어난 시부(詩賦)를 만들어 명성을 올리는 것만을 원하고 있었다.
<중 략>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즉 “士當先天下之憂而憂,後千下之樂而樂 (治者는 마땅히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 하고,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wmf워한다.)”이다. 이 말로써 그의 포부를 알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당시는 그와 같은 포부를 가진 사람이 너무 적었다. 그가 재주를 다 못한 것은 그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宋 자체의 불행이었다.
왕안석의 개혁은 새롭고 독창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신법에 포함되어 있는 이른바 부국책이나 강병책 그리고 과거제와 학교 교육의 개혁 등은 모두가 이전에 개혁을 논의할 때에 흔히 나오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왕안석의 개혁은 국초이래의 개혁주장의 연장이지 결코 혁신적인 개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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