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구의 생애와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3.05.15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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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그들의 생애와 정치적 대립, 그리고 10만원권 지폐에는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 중 누가 적합한가에 대한 가상 토론이 적혀있습니다.
목차
1.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어떠한 생애를 보내셨는가?
2.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의 대립
3. <우리 조의 토론>
본문내용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어떠한 생애를 보내셨는가?
이승만 박사의 생애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했다. 그 이후 서재필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에는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에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1914년에는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열렬히 폈었다.
< 중 략 >
2. 친일파에 대한 인식의 차이
해방이 되고 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일제 시대부터 사회지도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친일파들은 청산되지 않은 채 정부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임시 정부 요인들은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현실정치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이 지원하는 지도자였지만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관계로 국내 정치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러한 약점을 메꾸는 방법이 친일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친일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의 반민특위(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 활동을 방해하고 저지시키는데 배후 역할을 헀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김구는 친일파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김구는 친일세력과는 같은 하늘아래 살수 없는 인물이다. 김구는 친일파에게 있어서 저승사자와도 같은 <북한과 남한 내의 좌파세력>과도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친일파들에게 김구는 기피대상이었다.
참고 자료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72072&mobile&categoryId=200001109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35021&mobile&categoryId=200001110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