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
- 최초 등록일
- 2013.06.04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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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 중국의 전쟁계획 참여와 물적 지원
3. 중국의 참전
4. 미-중 대리전의 전개
5. 전쟁의 정치적 종결: 한반도 휴전체제의 성립
6. 맺음말: 중국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1.서론
중국의 최고지도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6·25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김일성-스탈린과 함께 전쟁 개전 과정에 개입했으며 병력을 지원했다. 또한 중국은 1950년 10월 전쟁 참여 후부터 1953년 7월 휴전에 이르기 까지 6·25전쟁의 전개과정과 종결에 결정적인 영행을 끼쳤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과 중국에 미친 영향은 6·25전쟁 이해의 중심적 테마들 중의 하나이다.
2. 중국의 전쟁계획 참여와 물적 지원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남침의사를 직접 표명했으나, 스탈린은 허가 대신 북한과 협의하면서 1949년 6월부터 대남공격용 무장원조를 본격화했다. 1949년 8월 북한이 대한민국과 병력 및 장비 면에서 대등한 수준에 이르자 38선 근처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한 김일성의 8월 12일자 개전 요청에 대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차원에서 남침을 승낙하지 않으면서 북한 인민군을 강화시킬 것을 지시했다.
<중 략>
7월 10일 직후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26일에는 의제를 합의했다. 하지만 1952년 5월 포로송환문제- 즉 전쟁포로의 자유송환(유엔군 측의 입장)이냐 전원 본국 송환(공산 측 입장)이냐-만이 미해결의 난제로 남게 되었다. 공산측은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에 맡겨, 그들의 귀국문제를 전당하게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의를 하면서 1953년 4월 11일 상병포로교환협정이 성립되어 협정각서가 교환되었다. 결국 6월8일 포로의 자유송환 원칙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어 휴전협정은 사실상 매듭 지워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