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 따른 미국과 일본의 갈등관계 1
- 최초 등록일
- 2013.07.14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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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은 전쟁국가 이다. 국제관계를 상하 관계로 파악했으며, 상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곧 힘(군사력)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외인식은 ‘전쟁주기설’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강국과 약국에 기습공격등의 야비한 수법으로 여러 불평등 조약을 맺었으며, 억지로라도 구실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게 일본은 시력을 확장했고 세력의 확대는 일본을 세계5대강국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만족을 몰랐던 일본에게 더 큰 욕심을 불러 일으켜 미국이라는 강대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초래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청일전쟁의 승리 때 받은 배상금같은 이익은 없었지만 조선과 만주 등 해외 시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조선 독점이라는 목표달성을 이룩한 일본은 태평양으로의 진출도 모색함으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중인 미국과의 대립은 불가피 하였다. 어쩌면 이때부터 태평양전쟁 이미 예언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 략>
한편 대 소련전을 준비하던 일본은 1937년 7월 북경 교외에 있는 노구교에서 소련전쟁에 대비하여 야간 훈련을 하는 도중 훈련병사 한 명의 행방불명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를 중국의 음모로 판단한 일본군의 총격으로 전투는 시작 되고, 화북 지방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에 의해 전투는 더욱 치열해 진다. 그러나 선전포고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주사변 처럼 단기간에 끝날 줄 알았고, 무엇보다 선전포고를 하면 중국에서의 치외법권과 조계 등 조약상의 권리를 상실할 뿐 아니라 1935년 미국이제정한 중립법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종래의 모습과 달리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은 통일된 모습을 보이며 철저히 희생하고 철저히 항전할 결의를 다졌다. 이로 인해 전쟁이 길어지자 2년 이상의 장기전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본은 장제스의 지구전에 불안을 가졌다. 장기전에 대비하여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전시체제를 구축하였고 전쟁의 목적이 단순한 승리가 아닌 “동아(東亞) 영원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신질서의 건설에 있다고 밝히면서 천황을 맹주로 하여 공동의 국방, 일체화된 경제, 문화 공동체를 이룩하여 미국과의 세계 최종전에 대비까지 내다보았다. 이는 중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독선적 아시아주의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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