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전쟁의 추억
(1) 지식인, 엘리트집단
(2) 일반 대중들
(3) 이승만 정부
2. 1950년대 반공주의의 전개
(1) 정치 속 반공주의의 활용
① 북진통일론
② 조봉암 사건
(2) 반공주의의 사회·문화적 현상화
① 문학, 반공주의와 손잡다
② 영화 속 반공주의
(3) 교육 속에 나타난 반공주의
① 교육정책 속 반공주의의 반영,
② 학도호국단과 반공 교육대회
3. 결론 : 이승만시기 반공주의의 특징과 몇 가지 생각
본문내용
1. 전쟁의 추억
1950년 6월 25일, 남측에서는 ‘6.25’라 부르고 북측에서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부르는 전면전 한국전쟁1)이 발발했다. 가공할만한 무기와 화력이 집중된 이 전쟁은 반도를 3년 동안 참혹하게 유린했다. 사람들은 모든 폭력에 억눌리고 끊임없는 광기에 시달렸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했던 시대, 이성(理性)과 침착(沈着)은 사치일 뿐이었다. 아무도 승리하지 않은 전쟁. 그리고 영원히 승리자가 없을 이 전쟁에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야누스였다.
전쟁은 시대현실과는 무관할 것 같았던 ‘동막골’2)에 이르기까지 그 잔혹한 칼끝을 들이대지 않은 곳 없었다. 전쟁으로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며, 그 파괴와 소멸의 자리에 공포와 고통이 철저하게 각인되었다.
비록 전쟁은 물리적인 휴전의 상태로 끝났지만, 전쟁 후 우리의 역사는 이 끔찍한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더더욱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50년대는 그랬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반공주의의 절대화’가 이 전쟁과정에서 어떻게 텃밭을 구축했는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집단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끌어낼 것이다.
(1) 지식인, 엘리트 집단
전쟁이 끝난 후, 남측의 지식인들에게 한국전쟁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전쟁으로 인해 월북, 납북된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북측과 정치, 사상적 이념을 같이하거나 아니면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렇지 않았다 해도 남한 내부에서 어떠한 사건으로든 많은 수가 숙청당했으며, 전쟁 후에 잔존했다 하더라도 이전과는 다르게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 단순한 사상적, 정치적 성향을 떠나 이제 공산주의는 나와 가족의 생명을 유린하는 ‘적(敵)의 이념’으로서, 그 정도에 상관없이 동조한다고 간주되었던 사람은 무조건 사라지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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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