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상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최초 등록일
- 2013.09.10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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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책을 보는 내내, 언젠가 보았던 영화 <그르바비차>가 떠올랐다. 여성들이 눈을 감은 채 무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늘어져 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담담하게 훑으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그 무리 사이에서 카메라를 분명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한 여인, 에스마와 그녀의 딸에 관한 이야기다.
‘인종청소’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생겨난 보스니아 내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스마의 남편은 ‘유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이다. 사라는 아버지를 궁금해 한다.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엄마, 난 아빠의 어디를 닮았어?”, “왜 엄마는 아빠 얘기를 하지 않는 거야?” 그러나 에스마는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아빠의 어디를 닮았느냐는 딸의 물음에 에스마는 “넌 나를 닮았어.”라고 답한다. 사랑하는 딸 사라의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에스마는 나이트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취직한다. ‘순교자의 자식’은 수학여행비가 면제되지만,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가면서까지도 에스마는 ‘증명서’를 내놓지 않는다.
<중 략>
한국 남성들은 일제 시대 ‘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의 몸을 파괴하여 한민족의 정신까지 파괴한 수치스러운 경험’이라 여긴다. 전시 강간을 여성 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 혹은 순결과 정절 훼손으로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정복은, 곧 ‘자궁 정복’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게 그랬듯, 한국이 베트남에게 그랬듯, 전시 강간이 공식적인 전쟁 정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저자가 책의 문두에서 이야기한 우리나라의 이중적인 역사관(미군의 양민 학살, 나치의 유태인 학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보상과 책임을 요구하면서 정작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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