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민족주의
- 최초 등록일
- 2013.11.01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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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구의 민족운동과 민족주의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한국에서의 민족운동
1. 김구의 민족운동
(1) 국내: 애국계몽운동(실력양성운동) - 교육
(2) 국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는 김구가 만든 비밀결사조직 한인애국단
[2]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론
1. 김구의 민족주의
본문내용
김구의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행한 민족운동과 민족주의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전반적인 한국에서의 민족운동에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 한국에서의 민족운동
한국 민족주의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전후로 일제침략이 시작된 이후, 외교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게 되는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 전후까지 일제의 단계적 침략에 대한 각종 배일운동과 의병항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1919년 3·1운동 사이에 있었던 의병전쟁과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길러 국권을 찾으려는 애국계몽운동 등의 방향과 이념이 정립되면서 성장해 갔다. 그리고 3·1운동을 계기로 큰 발전이 이뤄지면서, 1945년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민족주가 형성되는 시기의 항일운동을 유형별로 크게 나누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1876년 개항 전후부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까지 전개된 위정척사운동이다. 위정척사운동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적 양반층과 전국 유생들이 주축이 된 운동이었다.
둘째,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된 농민군의 항일전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세도정치 이후 신분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며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이 내적인 이유라면,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의 모순에 도전하여 봉기하였던 동학농민군은 청일군이 파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하고 친일정권을 세울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국을 정치적으로 병탄하려는 기세가 보이자 재기하여 구국항일전을 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로 근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치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만 치렀고,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지도급 인물들도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그 뒤 일본군과 관군은 해산, 잠복한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수색, 학살하였다. 그렇지만 농민군의 세력은 삼남일대에서 경기·강원·황해·평안·함경도에까지 번져 나아가 전국적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끝내 모두 진압되고 말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