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역사의 숲<선릉 • 정릉>
- 최초 등록일
- 2014.01.13
- 최종 저작일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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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2.1. 조선 이전의 왕릉 형식
2.2 조선 왕릉 형식의 정착
2.3. 조선왕릉
2.4. 선릉
2.5. 정릉
2.6. 사진으로 만나는 선정릉 답사기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지난 5월 고궁박물관에서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된 전시가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현재 울산시에서는 반구대 암각화를 새롭게 유네스코 세계유산로 등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댐 건설로 인하여 암각화가 이끼로 뒤덮이면서 이미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는데도 보존방법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지금도 물 속에 잠기고 나오기를 반복하며 방치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문화재의 유네스코 등록을 위하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대장경판, 종묘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는 아리랑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무형의 여러 문화재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되었다는 것은 소재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높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조선 왕릉의 봉분 밑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잠든 석실(石室)이다. 석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실체가 드러난 적 없다. 한 번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국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석실의 비밀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경기 여주군). 지하 3m에 석실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하 1.5m 깊이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지하 3m 깊이로 묻었는데 당시 극비사항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릉의 석실은 길이 3.80m, 너비 6m, 높이 1.70m에 이르렀다. 화강암으로 벽과 문, 천장을 만들어 이었는데, 석실 좌우 벽으로 쓰인 화강암 하나의 길이가 3.80m, 높이는 1.70m, 두께는 0.7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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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가 파해진 조선왕릉의 비밀 1 –연산군은 독살당했다- 한성희 저, 2006년, 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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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릉 이호일 저, 2003년, 올 컬러
쏭내관의 재미있는 왕릉기행 송용진 저, 2005년, 두리미디어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이우상 저, 2009년, 다할미디어
이야기 한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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