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의 진실
- 최초 등록일
- 2014.03.31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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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2. 당시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의 관계
3. 이토 히로부미의 진실
본문내용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 이토 히로부미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21년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천엔권 지폐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일본 내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반대편 극단에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단순히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 으로만 생각해도 괜찮을까.
■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로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하기번의 무사 집안인 미즈이가의 양자가 되면서 하급무사의 신분을 얻었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며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1863년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조슈번 사이에 시모노세키전쟁이 일어나자, 전후 평화교섭 과정에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864년 조슈번과 막부 사이에 벌어진 막장전쟁에서 보수파들이 막부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키 신사쿠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이름을 바꾼 뒤 신정부에 참여하여 외국사무국 판사, 효고현 지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영어에 능통하여 1870년에는 화폐와 은행 제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71~1873년에도 해외를 시찰하였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자 그를 계승해 내무성의 내무경이 되었으며, 1881년에는 정부 안에서 국가 구상을 둘러싸고 그와 대립하던 오쿠마 시게노부을 추방하고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뒤 1885년 내각 제도가 창설되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1888년에는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