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의출산방법
- 최초 등록일
- 2014.04.14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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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요약: 조선시대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처음에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603년(선조 36) 3월 내의원(內醫院)의 계(啓)에 의해 중전산실청(中殿産室廳)을 설치하고 전례에 따라 의관(醫官) 3명을 입직하게 하되 제조(提調)는 입직할 것 없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또 1635년(인조 13) 12월에 대행왕비(大行王妃)가 분만 뒤 7일이 안 되어 죽었으므로 산실청 입직의관들을 잡아다가 죄상을 신문했다 하며, 이듬해 4월에는 원손(元孫)이 탄생하여 산실청 도제조(都提調)와 의관, 그리고 의녀 및 하인들에게 말·돈 등의 은전(恩典)을 베풀었다고 한다.
한편, 1688년(숙종 14) 12월에 왕자가 나서 호산청(護産廳) 의원에게 가자(加資)를 명했고, 또 1694년 9월에는 숙의(淑儀) 최씨가 훗날의 영조가 될 왕자를 낳으매 예에 따라 호산청 의관들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호산청은 후궁들의 출산을 위해 설치한 기구였다.
<중 략>
아이를 낳을 장소에는 산자리를 깔았는데, 맨 아래부터 볏집, 가마니, 풀로 엮은 돗자리, 양털 방석, 기름종이의 순으로 놓았다. 또 그 위에는 백마 가죽을 놓았다. 백마 가죽의 머리 아래쪽에는 비단을, 머리 위쪽에는 날다람쥐 가죽을 두었는데 아들을 많이 낳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 다음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말고삐를 방벽에 걸어 분만 중의 산모가 힘을 쓸 때 붙잡도록 하였다.
자리를 다 깐 후에는 어의가 차지부의 주문을 세 번 읽었다. 그 후 천장에 방울을 달아 위급할 일이 있을 때는 방울을 울려 사람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출산 후에 산자리를 걷어서 걸어 놓기 위해 산실문 밖에 세 치 길이의 못을 3개 박고, 그 못에 붉은색 끈을 묶어서 늘어뜨려 두었다.
왕비는 해산하기 위해 산자리에 올라앉은 후, 벽에 붙였던 최생부를 떼어서 촛불에 태운 다음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손에 해마와 석연이라는 해산 촉진제를 쥐었다가 해산 후에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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