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입문] 기말고사정리파일 - 경상대학교 사학과 전공
- 최초 등록일
- 2014.05.04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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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상대학교 사학과 전공과목 시험 자료입니다.
시험예상문항을 각자 정리해서 레포트로 작성 후 제출, 시험은 시험대로~ 찾는 자료이길바래요.
목차
1 카롤링거 르네상스
2 대공위 시대
3 아비뇽 유수
4 봉신
5 은대지 제도
6 길드
7 실재론
8 장미전쟁
9 인클로저(Enclosure)
본문내용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대해 알아본 이유
- 15세기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9세기쯤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처음 들어본데다가 뒤에 일어나는 르네상스와 헷갈리지 않게 정확히 알고 넘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용
카롤링 르네상스는 프랑크 사회를 그리스도교적인 사회로 변형시키려는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필연적으로 문화 부흥을 수반했다. 샤를마뉴는 교리 교육을 위해 수도원과 교회의 부속학교를 설립하고 라틴어를 교육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럽 각 지역으로부터 알퀸(Alcuinus), 부제 파울루스(Paulus), 테오둘프(Theodulph) 등 학자들을 초빙하고 자신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영국 출신의 수도사인 알퀸은 샤를마뉴 궁정에서 15년 동안 머물면서 학자들을 지휘하였다. 그는 학문의 영역을 3학과 4학과(문법 ·수사(修辭) ·논리의 3학과,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의 4학과)로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구분은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샤를마뉴 시대의 학문의 본거지는 수도원들이었으며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은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인민은 여전히 문맹이었으며 광범위란 지식인 계층은 형성되지 않았다. 9세기의 창조적업적은 보잘 것 없었다. 카롤링 학자들은 방대한 양의 시를 쓰고, 수도원은 많은 연대기를 작성했으나 내용적으로는 무미건조하면서 고전문화의 형식적 모방에 그쳐 창조적인 창작에 이르지 못했다.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문화부흥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업적은 매우 한정적이었으나 고전연구와 문학은 어느 정도 부활했다. 9세기 중엽에는 유럽의 전 지역에 고전문학과 교부들의 저작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이 있었다. 수도사들은 노동의 의무를 책을 필사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고전의 대부분이 카롤링 시대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편집될 정도로 필사본이 크게 증가하였다. 필사본의 대규모 양산과 함께 글자체도 크게 개선되었다. 카롤링 소문자체는 주로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 개발된 것으로 오늘날의 소문자체는 여기서 기원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