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硏究 百年
- 최초 등록일
- 2014.05.24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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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舊史學과 新史學
2. 王朝末 前後의 韓國史學 - 內國人
3. 王朝末 前後의 韓國史學 - 外國人
4. 3.1 運動 후의 韓國史學
5. 日本侵略戰下의 韓國史學
6. 民族解放 以後의 韓國史學
본문내용
1. 舊史學과 新史學
① 조선후기 실학이 꽃핀 18~19세기 영, 정, 순조 시대는 역사학에서도 황금기였다. 정부의 기록보존 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전기, 금석, 지지, 민속 등 민간에서도 여러 업적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② 그러나 서양 근대문물과의 접촉이 잦아지고, 특히 1890년대의 갑오경장 전후에 개화의 물결이 현저하게 밀려닥치면서, 구학문과 신학문의 대립이 벌어졌고, 지식인들에게 어느쪽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게 하였다.
③ 역사학도 마찬가지의 시련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은 구학문과 신학문이 대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근대 역사과학은 엄밀한 실증을 요구하지마는, 청조 고증학과 같은 것은 서양식의 실증에 결코 손색이 없는 과학적인 방법을 썼다고 할 수 있다. 또 사건의 인과를 정리하여 사항별로 서술하는 중국 전래의 기사본말체는 서양 근대의 역사서술 형식과 그렇게 큰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④ 그러나 구사와 신사 사이에는 역시 근본에서 다른 점도 많았다. 문제의식이나 연구의 시야에 있어서 큰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전근대적 사학이 본질적으로 근대적 사학으로 질적 전환을 수행하는 데에는 역시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던 것이다.
2. 王朝末 前後의 韓國史學 - 內國人
⑤ 구학문이 퇴조하고 신학문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역사학의 경우에도 거의 불가피의 세이었다. 그러나 역사과학으로서의 한국사학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지부진이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특히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로 근대화와 식민지화가 아울러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역사학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는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