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봄은 어떻게 왔는가?
Ⅱ. 唐代 서역 경영의 추이
Ⅲ. ‘장안의 봄(長安春)’
Ⅳ. 맺음말; 겨울의 도래
참고문헌
본문내용
위장이 노래했던 것처럼 당시 장안은 봄을 맞아 만개한 꽃과 같았다. 이러한 봄은 당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온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장안이라는 이국의 수도에서 펼치면서 찾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장안의 봄빛은 임자가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기실 7~10세기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시작된 길은 모두 당의 수도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新羅와 日本에서 渡唐留學生과 渡唐留學僧들이, 突厥ㆍ契丹ㆍ回紇(위구르)에서 용병들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왕국에서 화가와 음악가들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사마르칸트 등지에서 상인들이 당으로 몰려들었다. 장안은 단순히 당의 수도로만 기능하는 도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빛나는 문명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안의 봄’은 결코 단기간에 찾아 왔던 것이 아니다. 前漢 武帝 때 張騫의 서역 개척과 李廣利의 서역 원정 이래, 중국의 서역 지배와 경영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집약된 결과였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장안의 봄은 汗血馬에 대한 무제의 욕망과 중국 전통의 中華思想이 빚어낸 창조물이자, 그것의 도래는 漢代부터 노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前章에서 漢ㆍ唐代 중국의 서역 개척 및 서역 경영에 대해 소략하게 개관하였으므로, 本章에서는 본고의 제목이기도 한 ‘장안의 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장안성 자체에 대한 것이다. 당의 장안성은 北魏의 洛陽城ㆍ東魏의 鄴城을 원형으로 삼고, 隋의 大興城에 의거하여 건설된 都城이었다. 장안은 중국에서 계획적으로 조영된 최초의 도시였다. 장안성의 건설은 582년 수 文帝가 전한 장안성의 동남쪽인 龍首原의 남부에 새로운 도성 건설을 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장안성의 도시 계획에는 여러 원리 및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는데,『周禮』「考工記」의 도성계획 원리, 지상에 우주의 거울로서 왕도를 건설하려는 천문사상, 음양오행사상, 王者에 적합한 토지를 왕도로 삼으려는『易經』사상 및 五胡十六國 이래 胡族의 도성 건축 습속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장안성이 京師, 즉 백관의 관청이 모여 있는 곳이자 사해의 백성들이 마음을 향하는 곳, 결국 천하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였기 때문에 장안성의 건설에 상술한 계획 원칙과 원리들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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