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양천제, 반상제)와 양반
- 최초 등록일
- 2014.06.06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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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조선의 양반
1) 조선 양반의 개념과 성립과정 2) 양반의 여러 특권과 신분적 지위
3. 반상제의 대두
4. 조선 후기 사족의 등장
5. 조선 초기 신분제에 관한 논의
1) 신분제 개편이 지니는 의미
2) 4 분설 3) 양분설
5. 맺음말/쟁점에 대한 견해
6.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는 고려 말·조선 초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새 왕조의 개국과 함께 직면한 신분 재편성의 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를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 확대 및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조선시대 신분구조에 관한 쟁점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 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객관적 인식을 갖고자 한다.
2. 조선의 양반
1) 양반의 개념과 성립과정
‘양반’은 두 가지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 하나는 관직제도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조선시대의 지배신분층을 지칭하는 것이다. 국왕이 조회를 받을 때 문신들은 동쪽에 무신들은 서쪽에 서게 되어있어 동쪽에 서는 반열을 동반 또는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 또는 무반이라 했다. 이 두 반열을 ‘양반’이라 불렀다. 이런 관직제도 상의 양반이라는 의미는 고려초기부터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시기에는 문·무반의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시기에는 문반의 지위가 지나치게 높았고 과거시험에서도 무과는 따로 치러지지 않았다. 때문에 무반은 문반에 비해 많은 차별대우를 받았고 결국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무신정권 하에서도 문반의 체제적인 우위는 시정되지 못했다. 이 같은 문반과 무반의 불균형은 조선 초기에 균형을 잡아갔다. 이렇게 양반이라는 용어는 관직체제 상의 문·무반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관직을 가진 사람뿐 만 아니라 그 가족과 가문까지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신분개념으로 까지 확대되어 사용된 것이다. 이들은 한번 관직을 차지하면 음직과 과거를 통해 이를 세습하려 노력했고 국가에서도 이를 보장해주었다. 이리하여 관직제도 상의 문·무반이라는 양반개념은 점차 최고지배 신분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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