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이후의 항일무장투쟁 단체 -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창립과 투쟁내역 및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4.06.18
- 최종 저작일
- 2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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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창립
2.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투쟁 내역
1) 광복군의공작대의 인도,버마 전선 파견
2) 국내 진공작전
3.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임시정부는 독립군 창설 준비를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1919년 9월 11일 공포된 통합임시정부의 임시헌법에서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사제도를 헌법상 정립했으며, 임시정부 수립직후 상해에서 군사학교를 세워 6개월 속성과정으로 1920년 5월 8일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초급장교 19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2회 졸업식후 휴교에 들어갔다. 중국과 만주의 러시아에는 3.1 운동 직후 약 40개의 독립군무장단체들이 조직되어 무장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부분이 이시기에는 임시정부를 승인 지지했으므로, 성립 직후 임시정부는 직속 독립군을 설치하지 않아도 만주의 독립군부대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전후부터는 임시정부는 극도로 약화되어 스스로 무력을 양성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1932년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의거의 성공으로 상황이 급전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는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측은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임시정부측과 중국 국민당이 면담하여 임시정부의 독립군에 대한 지원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하남성 낙양에 있는 중국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대를 설치하고 1933년에는 만주의 독립군 지휘관 지청천을 관내로 불러들여 교관을 명하고 한국인청년들이 군관양성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보다 1년 앞선 1932년에 김원봉은 동창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황포군관학교 출신 군단장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간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 장교훈련을 시켰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1938년에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시작하였고, 이와 별로도 1939년에는 한국인 애국청년들이 조선청년전지공작대 현성하여 전선에 나가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신용하 저, 한국 항일독립운동사연구, 경인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