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과 이에대한 나의 생각
- 최초 등록일
- 2014.07.23
- 최종 저작일
- 2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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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 받은 자료입니다.
한국현대사 수업 중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 남한의 정치세력은 어떻게 움직였는가,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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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후 국제 질서에 관한 강대국간의 일련의 협의 과정 중의 하나였던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국에 관한 결정이 내려진다.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상반된 입장이 있었다. 미국은 4대국이 행정 입법 사법기능을 수행하며 5년간 신탁통치, 5년간 연장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국제민간행정기구로 고등판무관 1일과 4대국 대표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신탁통치에 선행하는 통일행정부의 설치를 거부하며 선정부수립 후 신탁통치와 신탁통치 기간의 최소화라는 역제안을 한다. 이는 미국은 국제적으로 해결을 하도록 하면서 주도권을 보장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소련측은 한반도의 국내외에서 자신들의 정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 략>
좌우합작 주체의 의도는 좌우합작에 기반한 남북합작과 단합된 민족주체 역량으로 미소공위재개와 성공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좌익을 분열시켜 우익주도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민주의원을 토대로 입법기관으로 발전시켜 미소공위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추진시키고자 했다. 이 때 민전의 좌우합작 5원칙 제시로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 좌우합작 5원칙은 박헌영의 북한방문 이후로 제시된 변화였다. 박헌영은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에 조공이 신전술을 채택할 것을 건의했고 대미투쟁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중도파들은 좌우합작 북한의 제시를 절충한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지만 좌익 내부에서는 강경한 대중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세가 변화했고 트루만독트린으로 미군정의 정책 또한 냉전을 맞이했다. 사실상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의 입법기구 창설(남조선과도입법의원)로 해소되었고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실패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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