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2. 인천 개항과 조계지 설정
3. 도시경관의 발전과 변화
4. 조계지내 갈등과 사회모습
5. 맺음말
본문내용
인천의 개항은 조선의 근대역사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서구와의 통상을 통해 인천 뿐 아니라 한국 근대화의 창구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으로 들어오는 근대문물은 곧바로 수도 한성으로 이어졌고, 나라의 근대화를 직접적으로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계와 부내면 일대의 협소한 지역(약1.6평방마일)에서 발생한 개항도시 인천의 경제, 문화적 영향은 전국에 미쳤으므로 인천 개항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인천 개항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도시 발전의 모습이다. 개항장인 제물포는 조계가 생겨나면서 모든 중심 기능이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새로운 시가지가 생겨나면서 눈부신 발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10년 한일 합방이후 1914년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조계는 철폐되었지만, 인천은 이 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 략>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될 항구는 부산, 원산, 인천이었는데, 부산과 원산의 경우는 비교적 원만하게 개항이 되었지만, 인천은 6년이 지난 후에야 개항되었다. 인천의 개항이 늦어진 이유는 조선정부와 일본 양측이 가진 반대요인 때문이었다. 조선정부에서 인천 개항을 반대한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인천의 위치가 수도와 근접해 있어서 이 항구의 개방이 국도의 안전, 사직과 왕실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하는 점. 두 번째, 인천의 개항으로 미곡을 위시한 식료․생필품이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수륙의 상품이 분열하여 경성에 모두 모이지 않아 경성의 시화(市貨)가 무너지고, 서울이 쇠퇴될 우려가 있다는 점. 세 번째 원산에 이어 인천까지 개항하게 되면 국고가 핍박하여 개항시설에 투자할 財力이 없다는 점을 주장하며 개항을 반대하였다.
<중 략>
이 사건은 술 취한 일본인들이 한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사건이었는데, 단순히 음주 후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그 강도와 가담한 인원의 수가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건은 공통적으로 조선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항 후 외국인의 치외 법권이 적용됨도 있지만, 은연중에 조선인을 무시하는 외국인들의 성향이라고도 생각된다. 특히 조선인에 대한 멸시는 일본인에게서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아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의 기세가 높아져 자신들을 일개 조계의 거류민이라기보다는 조차지의 점령인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 자료
인천시사편찬위원회, 1933,『인천부사』나채훈․박한섭, 2006,『인천개항사』(미래지식)
이희환, 2008,『인천아,너는 엇더한 도시-근대도시 인천의 역사,문화,공간』(도서출판 역락)
인천광역시 중구문화원, 2010,『인천광역시 중구사』(인천광역시 중구역사편찬위원회)
인천항운노동조합, 1995,『인천항변천사』
이현종, 1980,『한국개항장연구』(일조각)
강경락, 2006,「사학부:천진과 인천의 개항장 비교연구」『중국학보』(한국중국학회)
고경운, 2012,「개항기 인천의 무역변동」(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김남희, 2011,「통감부 시기 인천의 일본조계지 확장과 식민기반 구축」(국민대학교 대학원)
김용하, 1996,「개항과 근대항만도시로의 발전」『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김용하, 1993,「인천 개항 초기의 시가지 형성」『황해문화』창간호, (새얼문화재단)
김용하, 1994,「인천의 도시로서의 성장」『황해문화 통권4호』(새얼문화재단)
김종근, 2011,「식민도시 인천의 거주지 분리 담론과 실제」『인천학연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김종혁, 2011,「고지도와 근현대지도로 읽는 인천」『역사와 문화지리로 보는 인천』(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김학준, 1996,「개항 시기와 근대화 노력 시기의 인천」『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김형목, 2012,「개항기 다문화 유입에 따른 사회변동과 일상사 변화 :부산과 인천을 중심으로」『역사와 교육』(역사와 교육학회)
민윤, 2009,「개항기 인천 조계지 사회의 갈등과 사회문제」(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서민원, 2009,「인천 조계지 형성과정과 건축 양식의 특성 연구」『디자인지식저널』(한국디자인지식학회)
송규진, 2003,「개항기 조선과 서양의 경제교류」『民族文化論叢』(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오미일·배윤기, 2009, 「한국 개항장도시의 기념사업과 기억의 정치―인천의 집단기억과 장소성을 중심으로」『사회와 역사』(한국사회사학회)
윤호, 2008,「개항기 인천의 민족상인 활동에 관한 연구」『인천학연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이규수, 2003,「개항장인천(1883~1910)-재조일본인과 도시의 식민지화」『인천학연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이영호, 2004,「개항장 인천에서의 상권경쟁과 민족성」『역사문화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역사문화학회)
이용식, 2008,「청일전쟁전 개항장 인천을 통한 조청무역의 발달:조선통상삼관무역책을 중심으로」『인천학연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이희환, 2011,「개항기 일본인들의 ‘인천’표상 : ‘식민도시 인천’탐론의 기원」『역사문화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전종한, 2011,「일제강점기 원인천 지역의 일본식 지명과 장소의 정치」『역사와 문화지리로 보는 인천』(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정소연, 2008,「개항장의 도시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마산 개항장을 중심으로」(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
최영준, 1974,「개항을 전후한 인천의 지리적 연구」『지리학과 지리교육』(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
하원호, 2006「개항후 인천의 대외무역과 그 영향」『한국민족운동사연구』(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 개항 이후의 무역 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