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 최초 등록일
- 2014.11.06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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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위화도회군의 배경(여말선초)
2. 위화도회군의 경과
3. 위화도회군의 결과와 의의
4. 신흥사대부의 진출
본문내용
1. 위화도회군의 배경(여말선초)
위화도회군은 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 조민수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1354년(공민왕 8)에 고려는 농민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원의 요청으로 최영을 장수로 하여 2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에는 중국 허베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난징에서 명을 건국한 뒤 북벌에 성공해 원나라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낸 뒤에는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친명반원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1369년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요동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진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명나라는 고려가 요동으로 진출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고려에 대한 경계와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명나라는 1371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요동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했다. 당시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명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의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른 이인임도 명나라 사신 채빈의 살해사건 등을 계기로 원나라, 명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387년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직접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 2월에는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그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곳은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탈환하여 화주목을 설치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참고 자료
1~3번 - 두산백과
4번 - 김영숙, 1985, 조선왕조성립의 배경에 관한 고찰, 논문집,Vol.5 No.-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