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 최초 등록일
- 2014.11.23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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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 교토의 적산서원에는 활은 든 장보고(張保皐)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또한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의 적산법화원에서도 장보고의 영정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서남해안의 해적을 평정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는 우리 역사서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도 상세하게 소개된 국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어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었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 때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하며,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圓仁)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보고는 진정 위와 같은 찬사를 받을 만한 인품을 지녔을까.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장보고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는 부분을 발췌하여 장보고라는 인물의 인성적 측면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장보고의 가계와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장보고(張保臯)[『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년(年)은 연(連)이라고도 한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또한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헤엄쳐 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날램과 씩씩함을 견주어 보면 보고가 연에게 좀 미치지 못하였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서서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녕군(武寧軍)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고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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