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과+아나키즘
- 최초 등록일
- 2014.11.28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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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김원봉과 의열단
1) 김원봉
2) 의열단 창단과 특질
3) 의열단의 활동수단과 주요 활동
4) 의열단의 이념
Ⅱ. 아나키즘
1) 아나키즘의 의의
2) 아나키즘의 수용
3) 의열단의 아나키즘
Ⅲ. 의열단의 의의
본문내용
Ⅰ. 김원봉과 의열단
1)김원봉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의 한 농가에서 9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원봉의 소년 시절은 김원봉의 회고담에 기초하여 소설가 박태원이 집필한『약산과 의열단』1947에 잘 드러나 있다.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의협심과 기개가 출중하였는데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력武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5세 때 집에서 50리 떨어진 표충사라는 절에 들어가『손자孫子』,『 오자吳子』등의 병서를 1년간 읽었다. 한때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18세1916년 때에는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독일 유학을 꿈꾸어 중국 톈진天津에 있던 덕화학당德華學堂(학교 경영자는 독일인)에 입학하였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게 된 계기는 중국에서 맞이한 3·1운동이었다.『약산과 의열단』에 따르면 3·1운동의 민중봉기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조선 민중의 크나큰 힘을 실감하였다. 그런데 뒤늦게 받아본「조선독립선언서」를 읽고는 크게 실망하였는데, 민중의 위력은 저렇듯 크나큰데도 선언서에서는 오로지 평화적 수단을 통한 독립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오직 민중의 힘이 뒷받침하는 폭력투쟁만이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더욱 굳혔다. 김원봉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폭탄 제조 기술을 습득하는 한편 동지들을 모았다.
2) 의열단의 창단과 특질
김원봉은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김옥·한봉근·한봉인·신철휴 등 8명과 함께 6월에 ‘급격한 직접행동’을 취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7월에 김원봉과 이종암은 상해로 가서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합숙하면서 약 3개월간 폭탄 제조법 및 조작법을 배우고, 10월에 길림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길림으로 망명해 온 곽재기·윤세주·윤치형이 합류하였고, 11월 9일 밤, 그동안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조직운영 방침과 당면 활동방향을 논의한 끝에,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의 길림 성내에서 의열단이 창단되었다. 이들은 소수 인원으로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급진적 노선의 항일 투쟁, 특정의 적 기관 및 요인을 투탄 공격하여 일제 식민지통치 기반에 타격을 가하는 작탄투쟁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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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룡,『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천안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오장환,『한국의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8.
한국근현대사학회 저,『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서울 : 한울아카데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