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사회주의 운동
- 최초 등록일
- 2014.11.28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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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분립
3. 파벌투쟁
4. 임시연합간부
5. 극동피압박인민대회와 웨르흐네우진스크의 통합대회
6. 꼬르뷰로 및 오르그뷰로의 설치
7. 양파 배격운동과 조선공산당
본문내용
1.머리말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재러한인사회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비귀화 한인세력과 최재형을 중심으로 귀화 한인세력으로 분립되었다. 비귀화 한인세력들은 일제 강점 이전 국내에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세력으로 항일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귀화 한인세력들은 1860년대 경제적 이유로 연해주에 이주한 자들로 항일 민족주의적 의식이 희박했다. 또 비귀화 한인들은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였고, 귀화 한인들은 볼셰비즘을 전파하여 사회주의혁명의 완수를 목표로 하였다. 비귀화 항인들은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코민테른 자금으로 상해파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에 귀화 한인들은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하고 전러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발전시켰다. 1920년대 이후 두 공산당은 군권과 모스크바 코민테른 자금을 둘러싸고 헤게모니 쟁탈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양파는 분립과 통합을 반복해 가면서 조선 국내에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여기서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분립되어 통합해가는 과정을 조망하고자 한다.
2.분립
1920년 11월 제정러시아군을 어느정도 전멸시켰던 레닌정부는 치타에 극동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 정부는 외관상 독립국가지만 실은 레닌정부의 러시아혁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상해파 고려공산당 위원장 이동휘는 자파 인물을 치타에 파견하여 국동공화국 원동부의 한인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 조직의 결과를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하여 김립·계봉우를 대표단으로 선출해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치타에 도착하였을 때 대소외교성과로 레닌정부의 자금 40만원을 갖고 상해로 오던 한형권·박진순·박애를 만났다.
치타에 모인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회의를 진행하여 한형권은 나머지 자금을 가지러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40만원은 박진순과 김립이 상해로 운반하여 박애·계봉우등 나머지 인원은 극동공화국에 파견되어 동아총국을 조직, 중국·일본·한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참고 자료
김방,「고려공산당의 분립과 통합운동」,『亞細亞文化硏究』,第5輯,pp․165-197.
임경석,『초기 사회주의운동』(천안,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2009),pp․293-313.
임경석, 「고려공산당 연구」,『성균관대학교 대학원』,1993.
권희영,『한인사회주의운동연구』,(서울, 국학자료원,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