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의 역사(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 최초 등록일
- 2015.02.20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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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삼국시대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2. 고려시대
1) 고려 초기
2) 고려 중기
3) 고려 말 ‘불교에서 주자학으로’
3. 조선시대
1) 조선 초기
2) 이후, 사림의 정치
참고문헌
본문내용
소수림왕 2년(372)에는 국가의 최고 학부로서의 태학이 건립되고, 이듬해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태학은 우리나라 대학의 효시이자 최초의 유교대학이라 할 수 있다. 태학은 유교의 오경을 중심으로 하면서 역사학과 문학 등 한학 전반에 걸쳐 교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오경 중심의 교육제도는 고구려의 통치이념이 유학사상에 입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마을에는 경당이라는 집을 지어 놓고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였다. 경당은 태학과 마찬가지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학과 문학 서적을 익혔으며 동시에 무술을 훈련하였다. 경당은 일반 서민과 천민의 교육을 담당하는 지방의 사립학교인 동시에, 비상시를 대비하여 무예를 단련하는 일종의 사비군 제도였다.
<중 략>
신라는 문무왕 8년(668) 삼국 통일 한 뒤, 제도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정책을 베풀어 통일정치, 화합 정치를 지향하였다. 불교의 호국 불국토사상과 유교의 위민 안민 보민사상에 입각하여 통일정치의 초석을 다졌다.
이와 같은 왕도정치사상은 성덕왕 21년(722)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줌으로써 더욱 무르익어 갔다. 이와 함께 유교적 통치수단이 점점 확산되면서 경덕왕(742) 때의 승려인 충담사는 「안민가」에서, 정명사상에 근거한 노래(시)를 썼다.
신문왕 2년(682)에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이며 국립대한인 국학을 확대하고 크게 정비하였는데. 국학에서 박사들로 하여금 경의를 강론케 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교대학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8세기 이후에는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당나라에 유학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었다.
<중 략>
성종 이후 관학파 유학자의 부패가 비판되기 시작했다. 비판자들은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비판자들은 중앙에 의한 타율적 통제보다는 향촌 사회의 자치적 질서를 중시하고, 엄격한 도덕률에 의해 규율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심고자 하였다. 이 비판자들이 바로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러한 사림파의 유학자들의 생각은 당연히 중앙의 권력자들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 충돌이 사화였다.
참고 자료
장지연 「조선유교연원」 나랏말씀 199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도서출판 한울 1997